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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 군집, 약치(藥治)에서 식치(食治)로 : 고추장[苦椒醬], 사도세자의 눈물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3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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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추장[苦椒醬], 사도세자의 눈물

 

조선시대 장의 발전은 고추장으로 완성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약으로 쓰이기 시작한 고추는 점차 식치(食治)의 약재로 변모하였고, 이후 보편화된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18세기 중엽에 발명된 고추장은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조선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식으로 변모하였다.

19세기에 고추장이 서민 대다수에게 보편화된 반찬이었다는 점은 당대를 대표하는 여러 문인들의 글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정조가 죽은 이듬해인 순조 1년(1801) 경상도 포항 인근의 바닷가 장기(長鬐)라는 고을로 유배를 갔다. 이곳에 머물던 정약용은 농민들의 삶을 10장의 시로 지었는데, 그 중 제7장에서

 

상추쌈에 보리밥을 둘둘 싸서 삼키고는 :: 萵葉團包麥飯呑
고추장에 파뿌리를 함께 곁들여 먹도다 :: 合同椒醬與葱根 1)

 

라고 노래하고 있다. 경상도의 바닷가에 있는 한적한 마을에 사는 농민들에게 상추, 보리밥, 파뿌리와 함께 고추장은 일상적 먹거리였다.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고추장이 처음 만들어진 이래 70~80년 만에 누구나 즐기는 일상적 먹거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사람들의 입을 사로잡은 것은 뛰어난 맛 때문이었다. 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한국의 장은 일찍부터 여러 재료를 더하며 맛과 매력을 더해갔다. 일찍이 15세기 중엽에 편찬된 『산가요록』에는 지화청장(只火淸醬)이 있고, 16세기 중엽에 편찬된 『수운잡방』에는 기울장[其火醬]이 보인다. 이는 모두 밀기울을 부가적인 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밀을 널리 재배하지 않았던 15~16세기의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全豉)는 고대 이래 독특한 우리의 장이었고, 전통적인 간장과 청장을 만드는 기본적 재료와 원리를 담은 것이다. 장의 고유한 맛과 보존성은 고농도의 소금과 발효에 의해 생성된 단백질에 기반한 것이었다.

여기에 후대에 탄수화물에 맥아를 더해 만들어진 물엿과 다양한 추가물에 포함된 유용물질이 맛과 향을 더하며 장의 맛과 효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다. 특이한 재료를 이용한 장 만들기는 16세기에 더욱 가속화하였고, 이후 고추장 만들기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재위한 연산군(1494~1506) 역시 장의 새로운 발전에 일획을 더한 것으로 보인다. 주색에 빠져 신열(身熱)이 몹시 나고 가슴이 답답하며 괴로운 증세[煩熱症]에 시달리던 연산군은 얼어 열매[於乙於實]로 담은 장을 마시면서 열광하였다.

“(얼어) 열매는 팥[小豆]보다 약간 크고 맛은 달고 시며, 즙(汁)을 내어 꿀에 타서 장(醬)을 만들면, 그 맛이 매우 시원하고 상쾌하였다.” 2) 고 한다. 얼어 밀장(於乙於蜜醬)의 맛에 빠진 연산군은 각 도 관찰사들에게 그 열매를 따서 바치게 하고, 승정원에

 

단사보다 붉은 빛 바짝 마른 폐 적시고 :: 色勝丹砂霑渴肺
앵두보다 나은 맛 쇠약한 몸 고쳐주네 :: 味堪櫻實改衰容
누가 알았으리오 가장 흔한 산속 과일 :: 誰知最賤山中菓
천금의 값이 되어 대궐에 바쳐질 것을 :: 價直千金獻九重

 

라는 어제시와 함께 얼어 밀장을 내리고 차운하여 시를 바치게 할 정도였다. 3)

17세기 초 허균(許筠, 1569~1618) 역시 함흥부사로 있던 한회일(韓會一)에게 사례하며, 구약나물의 뿌리를 가루로 만들어 끓여서 만든 곤약장(蒟醬)에 대해 특별히 감사를 표하였다. 4) 17세기 중엽 신속(申洬, 1600~1661)이 편찬한 『구황보유방(救荒補遺方)』(1660)에는 콩과 밀을 2 : 1로 사용하는 메주제조법이 소개되었다.

콩 한말을 무르게 삶고, 밀 다섯되를 볶아 함께 섞어서 메주를 쑤고
더운 온돌에서 띄워 황의(黃衣)가 입혀질 정도로 뜨면 말린다.

 

라고 하였다. 밀 재배가 확대되면서 이전에 밀기울을 사용하여 메주를 만들던 것에서 상당량의 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17세기 후반~18세기 초에 편찬된 『산림경제』에서 콩을 누렇게 삶아 만드는 말장(末醬)으로 양념용 장을 만들었다. 이 메주에 소금과 함께 천초(川椒)와 생강도 추가하는 내용이 상세히 설명되었다. 5) 이처럼 다양한 첨가물로 만들어진 장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해져 18세기 초에 이미 생황장(生黃醬), 숙황장(熟黃醬), 면장(麪醬), 대맥장(大麥醬), 느릅나무 열매 장[楡仁醬] 등이 상세히 소개되었다.

이뿐 아니라 산삼, 도라지[桔梗], 산 게[生蟹], 달걀이나 오리알 껍질, 마른 왕새우[大蝦], 쇠고기; 노루고기, 양고기, 토끼고기; 흰 파줄기, 좋은 생강, 천초(川椒), 무이(蕪荑), 진피(陳皮) 등을 부가하여 만들었다. 장에 부가하여 놓는 재료는 이전의 것들을 집대성하면서, 이후 만들어질 수 있는 장의 가능성을 망라하는 것이었다. 다소 과장하여 거의 모든 종류의 장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연후에 시도된 것이 고추장이었고, 그 성과는 18세기 중엽부터 확인할 수 있다.

영조 2년(1726) 궁궐의 장류를 담당하는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로 임명된 김도수(金道洙)는 자신이 관장하는 물건의 종류[雜物色]를 국왕에게 보고하였는데, 그 내용은 메주[末醬] 4647석 1두, 천초(川椒) 207근, 소금 700석 10.3두, 감장(甘醬) 342석 4.3두, 간장(艮醬) 41석 3.2두 6) 으로, 고추장은 보이지 않았다.

고추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영조 25년(1749) 이후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고추장은 ‘고초장(苦椒醬)’, ‘초장(椒醬)’, ‘호초장(胡椒醬)’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특히 영조 28년(1752) 4월의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苦椒醬은 근래에 담기 시작했는데, 예전에도 있었다면 왕에게 바치게 했을 것”이라고 하였고, 당시 “궁궐 밖 서민들 집에서 성행하고 있다[方外閭閻家則盛行矣].”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7) 고추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의 어느 시점이었다.

영조가 고추장을 처음 먹어보았다고 말한 영조 24년(1748)은 문헌으로, 논란의 여지없이 고추장의 존재를 가장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이다. 당시 영조는 마음의 병이 깊다는 등 5가지 이유로 영조 25년 초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바 있는 데, 대리청정을 명하기 1년 전인 영조 24년에 영조는 심각한 현기증, 입안의 염증과 밥을 먹지 못해 기력이 고갈되어 죽음이 임박한 처지였다. 사경을 헤매던 영조를 구원한 이는 세자였고, 세자가 한 일은 고추장을 구해 바친 것이었다.

세자는 영조에게 신맛 나는 음식이나 참외와 과일을 마련해 먹여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었다. 여기에 더해 수라상에 천초나 고추장을 올렸는데, 이는 영조의 입맛에 딱 맞았고, 이후 영조는 기력을 급속히 회복할 수 있었다. 8)

이후에 고추장에 매료된 영조는 맛 좋은 사가(私家)의 고추장을 계속 반입하게 하였고, 9) 고추장이 늙은이 입맛을 지켜준다고 칭찬하곤 하였다. 10) 특히 이인좌의 난 당시 청주목사를 지내며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한 조언신(趙彦臣, 1682~1731)의 아들 조종부(趙宗溥, 1715~ )의 집에서 담은 고추장[家物]은 영조의 입맛을 사로잡고, 기력을 회복시켜주었기에 오랫 동안 바쳐졌다. 11)

그러나 영조의 건강 회복은 세자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비치는 계기가 되었다. 영조는 고추장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고, 대신들은 건강해진 영조를 찾아 대리청정하던 세자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영조 31년(1755) 무렵 세자는 정신병이 시작되었다.

역사에서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세자가 고추장을 영조에게 바치지 않았다면 영조 38년 5월 뒤주에 갖혀 8일 만에 비참한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한국음식의 역사에서 장의 발달에서 고추장이 화룡점정의 의식을 치르는 순간 사도세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처음에 고추장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영조가 먹은 고추장을 만드는 법은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두 책을 통해 그 방법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입맛 잃은 숙종에게 바칠 음식을 수소문하여 모은 것이기에 『소문사설(謏聞事說)』이라 이름붙여진 책의 한 장인 식치방(食治方)에 순창 고추장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 비밀은

 

콩을 쑤어 두 말을 백설기 닷 되와 합하여 곱게 빻고 짓이겨 빈 섬에 넣고는,
정이월(正二月)에 7일 동안 띄워 볕에 쬐어 말린 뒤에 좋은 고춧가루 엿 되를 고루 섞는다. 12)

 

와 같이 만들어지는 순창 고추장이었다.

숙종 사후 이시필(李時弼, 1657~1724)은 1721~1722사이에 식치방을 편찬했는데, 순창 고추장을 만드는 방식이 한양에서도 활용되었는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순창 고추장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는 서울과 호서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던 고추장과 재료의 사용 비율에서 차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조가 고추장을 먹을 당시 태의원의약(太醫院醫藥)이었던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이 지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중림은 영조 42년(1766)이 편찬한 『증보산림경제』에서 고추장을 만들 때 메주 1말, 고춧가루 3홉, 찹쌀가루 1되를 사용하고, 이를 간장으로 반죽하여 만들었다고 소개하였다.

19세기 이규경은 ‘번초(番椒)’를 백성들이 고추[鄕名苦草]라고 불렀다는 점을 밝히며, 이것이 고추·호박·담배가 왜란 이후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세 종류의 작물이었다고 하였다. 원고 집필 당시보다 70~80년 전 승려와 평민이 먹기 시작한 것이 이후 누구나 일상적으로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고추장을 발명한 것은 승려들이었고, 이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것은 평민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noname01[그림1] 고추장을 만드는 데 사용한 주재료의 비율 변화

이규경은 고추장에 대해 식욕을 돋우는 좋은 맛이고, 또한 그 가루는 구슬처럼 붉고 선명한 것이 음식 조리에 쓰이는 최고의 양념으로 쓰인다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하루라도 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고추장에 매료되었다. 국왕인 정조 역시 행행에 나설 때면 언제나 정리소(整理所)에서 고추장[苦椒醬]을 필수품으로 챙겼으며, 13) 19세기 무렵 연희궁의 뜰 앞에는 고추를 심어 기르는 밭[苦草田]이 만들어졌다. 14)

이와 같이 고추와 고추장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고 보편화하면서 고추장을 만드는 방법에서 나타난 현저한 변화가 나타났다. 순조 9년(1809) 편찬된 『규합총서』에서 고추장은 삶은 콩 1말, 쌀 2되, 소금 4되, 고춧가루 5∼7홉, 찹쌀 2되를 사용하여 만든다고 하였다. 오늘날은 고추장을 만들 때 찹쌀 5되, 메줏가루 2되, 엿기름 2홉, 고춧가루 3되와 소금을 사용하는 것과 비교된다. 15)

18세기 이래 최근까지 고추장 만드는 방법상의 특징적인 변화는 고추와 쌀의 사용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찹쌀 등 탄수화물 성분은 엿기름과 작용하여 물엿을 생성하므로 고추장의 단맛과 장기보존성을 높여주는 기능을 하게 된다. 고추의 사용량을 늘리게 된 것은 매운 맛에 적응한 입맛의 변화에 조응하는 것이며, 동시에 단맛이 매운 맛의 상당 부분을 상쇄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단맛이 늘어난 고추장이 만들어지면서 고추의 사용을 늘릴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추와 찹쌀의 사용량 증가는 이전 메주의 누룩곰팡이와 소금이 담당하던 맛과 보존 기능을 물엿과 고추가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추의 매운 맛에 점점 더 잘 적응하고, 물엿이 매운 맛을 완화시켜준다는 점을 파악하고 이를 고추장 만드는 방법에 적용하여 개량하여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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