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말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오늘을 보면 역사는 반복한다는 생각도 들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오늘은 내우외환에 휩싸인 임진왜란 때의 ‘오래된 미래’처럼 느껴져 혼란스럽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선봉군 1만6천명이 부산포에 상륙한 뒤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4월 30일 한성을 떠나 몽진(蒙塵 임금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난 감) 길에 올랐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5월 8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그러나 6월 2일 고니시의 제1군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이 선조의 뒤를 바싹 쫓아오자 다시 평양성에서 7월 3일 의주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여차하면 압록강 건너 명나라로 내부(內附)할 참이었다.
7월 10일 명나라 조승훈(祖承訓)은 5천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요동으로 건너갔다. ‘왜적 따위’를 우습게 본 ‘대국의 천군(天軍)’이 가진 오만한 안하무인 자세 때문이었다.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즉 적을 모르고 아군조차도 모르는 싸움에서는 반드시 위태롭다는 것은 손자병법에 나와 있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제2군은 7월 24일 함경도 산악 험지를 거쳐 여진족이 있는 두만강 언저리 회령까지 올라갔다. 강 건너 여진마을을 습격했으나 만만치 않은 응전을 받고 이내 철수했다. 그 즈음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왜군에 투항한 순왜(順倭)인 국경인(鞠景仁)의 밀고로 가토 군에게 사로잡혔다. 조선의 운명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풍전등화(風前燈火) 형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 조정에 애걸복걸한 결과, 1593년 1월 7일 명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본진 5만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패장 조승훈과 ‘전시재상’ 류성룡(柳成龍) 등 조선군과 연합으로 평양성을 공격, 마침내 함락시켰다. 명군은 불랑기포(佛狼機砲),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砲) 등 화포를 발사하여 기선을 제압했다. 승기(勝機)를 잡은 이여송은 그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벽제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1월 27일 경기도 고양의 여석령(礪石嶺)에 매복해 있던 왜군의 기습을 받아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명군은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멀찌감치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때 류성룡은 이여송에게 후퇴해서는 안 되며 전열을 정비한 후 한양의 왜군 총본부를 쳐부숴야한다고 애원하며 간청했다. 그러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조승훈의 1차 평양성 패배로 왜군 세력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 평양 강복산에서 강화협상을 시작하였다. 밀고 당기는 우여곡절 끝에 1592년 9월 1일부터 50일 동안 휴전협정을 맺기로 결정했다. 그후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또 패배하자 1593년 4월 8일 용산에서 두 번째 강화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이 두 회담에서 심유경과 고니시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조선 조정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다만 류성룡 등 몇몇 대신은 조선강토를 가지고 찧고 까불며 ‘암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존명사대(尊明事大) 정신이 뼛속까지 박힌 선조는 왜란 초, 항왜원조(抗倭援朝)의 기치를 내건 명나라 장군에게 조선의 외교권(外交權)과 군통수권(軍統帥權)을 모두 넘겨주었다. 그랬기에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협상에서 조선의 존재감은 없었다.
1593년 6월 28일 진주성 2차 공방전이 한창일 때 명나라 사신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규슈 나고야성(名護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다.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에게 화건 7조(和件 7條)를 제시했다.
첫째 명황제의 왕녀를 일본천황에게 시집보낸다.
둘째 감합(勘合)무역(조공형식 제한무역)을 부활한다.
셋째 일, 명 양국의 대신은 우호의 서사(誓詞)를 교환한다.
넷째 조선 8도 중 북 4도와 한성(서울)은 조선에게 돌려주고 남 4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는 일본에 할양한다.
다섯째 북 4도를 돌려주는 대신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낸다.
여섯째 포로로 잡은 두 조선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돌려보낸다.
일곱째 조선의 대신은 일본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목적은 명군은 싸우지 않고 서둘러 전쟁을 끝내는 것이고 일본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조선 남부 4도를 할양받아 조선 지배를 위한 전초기지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화건 7조는 명황제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알고 명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승 겐쇼(玄蘇)는 화건 7조 대신에 일본의 항복문서를 위작(僞作)하여 명황제(神宗)에게 바쳤다.
그러나 이억만리 떨어진 곳의 사정을 잘 모르는 명황제 신종(神宗)은 ‘항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일본왕(日本王)으로 임명한다고 하자 1596년 9월 2일 히데요시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강화교섭을 결렬시켰다. 그리고 조선 남부 4도를 점령하기 위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히데요시는 명나라에 대한 보복조치로 조선 땅, 특히 전라도(赤國) 지방에 대한 보복살육전을 벌여 피의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남원성이 함락되었고 수백차례 분탕질과 노략질이 자행되었다. 특히 백성들의 수급(首級) 대신 코와 귀를 잘라 전과(戰果)로 보고했다. 왜병 1인당 3개 이상씩 할당을 했는데 조선 관군과 명군은 물론이고 수훈을 세우기 위해 일반 백성들의 코와 귀까지 무자비하게 잘라갔다. 교토(京都)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 도요쿠니 진쟈(豊國神社) 건너편에 귀무덤, 이총(耳塚)으로 남아있다. 1597년 7월 5일 강화협상에서 심유경(沈惟敬)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기연출이 들통나자 심유경은 경남 의령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체포되어 목이 잘렸다.
1594년 3월 명나라 황제 특사인 선유도사(宣諭都司) 담종인(譚宗仁)은 “왜군을 절대 토벌하지 말고 조선군을 모두 해체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금토패문(禁討牌文)을 이순신 장군 앞으로 보내왔다. 왜적이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진을 치고 있는 마당에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1594년 3월 6일
“맑다. 새벽에 망대에서, 적선 40여 척이 거제 땅으로 건너온다고 전하였다. 당항포 왜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운 일에 대한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늦게 고성 땅에서 배를 출발하였다. 순풍에 돛을 달고 거제로 향하는데 역풍이 불어 닥쳤다.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였더니 남해 현령이 급히 보고를 보내왔다. 곧 명나라 군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명이 명나라 담종인이 보낸 패문(牌文)을 가지고 들어왔다. 적을 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심기가 매우 괴로워져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하였다.”
1594년 3월 7일
“맑다. 몸이 매우 괴로워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문을 아래 사람을 시켜 만들도록 하였더니 글꼴이 말이 아니었다. 원 수사(원균)에게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내도록 하였으나 역시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내가 글을 짓고 군관 정사립(鄭思立)에게 쓰게 하여 보냈다. 오후 2시쯤 출발하여 밤10시쯤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
이 무렵 장군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12일 동안 위중한 상태였다. 금토패문과 관련, 장군은 통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갑오년 1594년 3월 6일 도사(都指揮使司) 담종인에게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란 답서를 보냈다.
“패문의 말씀 가운데 ‘일본 장수들이 마음을 돌려 귀화하지 않는 자가 없고 모두 병기를 거두어 저희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는 모든 병선들은 속히 각각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왜인들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 바, 거기가 모두 우리 땅이거늘 우리더러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이며, 또 우리더러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제 고장이란 또한 어디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중략)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답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元均),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 삼가 올림.”
당시 명나라는 조선을 빼놓은 채 왜와 강화교섭 중이었다. 그런데 감히 번방(藩邦)의 일개 조선 수군장군가 명 황제의 사신에게 항의답서를 올린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은 거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장군은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편범불반(片帆不返)’의 정신으로 이런 과감한 일을 결행한 것이다.
장군은 이후 9월 29일 장문포의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수륙 합공작전을 펼쳤지만 왜군이 성안에서 웅크리고 나오지 않아 이렇다 할 전과(戰果)는 올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장군은 10월 1일에는 영등포 해전, 10월 4일에는 제2차 장문포 해전을 계속해서 벌여나갔다.
1594년(선조 27) 조선 대표 의승장(義僧將) 유정(惟政, 四溟大師)은 단신으로 서생포왜성에 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4차례 걸쳐 휴전을 위한 강화회담을 벌였다. 그러나 가토는 조선 남부 4도 할양 등 무리한 요구를 했으므로 결렬되었다. 1594년 명과 화의가 어느 정도 진척되자 1595년 6월 28일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부산포, 죽도, 가덕도 왜성 등 몇 개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불태우고 왜군은 일본으로 철수했다.
1595년(선조 28) 2월 10일 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명의 유격장군 진린(陳璘)이 1월 12일 죽도(김해)왜성에 도착한 뒤 이곳에서 하루 숙식(宿食)한 후 13일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 1시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는 웅천왜성에 도착했다. 여기서 명의 대표인 진린(陳璘), 담종인, 유대무와 고니시 유키나가, 현소, 죽계 등 일본대표는 상호 철군을 위한 화의(和議)를 시작했다.” 이 때 시종수행원인 접반사(接伴使)로 따라 간 이시발(李時發)이 쓴 당시의 상황 기록을 보면 죽도왜성 및 웅천왜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정월 12일 죽도의 진영에 있는 소장이 배 위에 와서 보고 식사를 청하여 그대로 그곳에서 잠을 잤다. 그 진영의 넓이가 평양성 정도나 되었고 삼면이 강에 임해 있었으며 목채과 토성으로 둘러싸였고 그 안에 석성을 쌓았다. 웅장한 누각은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크고 작은 토우(土偶)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1만여명의 병사를 수용할 만한 크기였다. 성 밑에는 크고 작은 선박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들에게 붙어사는 우리 백성들은 성 밖에 막을 치고 곳곳에서 둔전(屯田)을 일구거나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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