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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 군집, 약치(藥治)에서 식치(食治)로 : 누룩[麯], 신의 선물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3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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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룩[], 신의 선물

 

누룩은 발효로 술을 만들고, 술은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술을 만들어 마시고, 손님을 접대하고, 조상을 공양하는 도구로 썼다.

누룩과 약누룩

[그림 1] 누룩[麯](출처 : http://tayler.tistory.com/632)과 약누룩[神麯]

고려 시대에 술의 제조법이 발달하고, 종류가 다양해진 것은 원과 강화가 이루어진 13세기 이후로 보인다. 12세기 고려를 방문한 서긍은 고려의 술은 멥쌀과 누룩을 섞어서 만드는 데 빛깔은 어둡고 맛은 뜨겁다고 하였다. 서민들이 마시는 술 역시 탁한 빛깔에 싱거운 맛으로 품질이 그리 좋지 않다고 보았다.1)

대몽항쟁 중에 고려는 원으로부터 소주의 제조법을 배웠고, 원은 13세기 후반 고려에 대해 일시적으로 술의 양조와 음주를 금지하면서 민간에서 누룩 만드는 것도 금지시켰다.2) 이러한 조처가 고려의 술 문화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 것인지 살필 수 있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후 고려에서 누룩과 술의 제조법이 발달했고, 술 맛이 크게 좋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원에 귀부한 김유는 고려 영동군(永同郡, 지금의 충북 영동군)에서 나는 향누룩(香麴子)을 구해 황제에 바쳤다. 이규보는 ‘국선생전(麴先生傳)’에서 술의 좋은 점을 들어 의인화하였고, 스스로 술과 관련된 엄청난 시를 남겼다. 이는 고려 고종 때 임춘이 ‘국순전(麴醇傳)’에서 술이 사람에게 끼친 해악을 강조한 것과 비교된다.

13~14세기에 걸쳐 술의 제조법이 크게 발달하였음은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불씨잡변’의 설명에서 엿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술은 누룩과 엿기름의 배합, 항아리의 품질, 날씨의 차고 더움, 담근 기간의 길고 짧음이 잘 조합되면 그 맛이 매우 좋아진다고 하였다.3) 술의 제조법이 상당한 수준으로 정밀하게 발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술맛이 좋아지고, 쓸모가 많아진 만큼 조선에서 누룩과 술은 사용량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5~16세기 문인들의 글에는 언제나 술이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더욱이 17세기 말~18세기를 살았던 이익(李瀷, 1681~1763)은 술을 “노인을 봉양하고 제사를 받드는 데 가장 좋은 음식”이라 하였고,4) 산림경제(山林經濟) 등의 백과전서류에서는 누룩과 술의 제조법을 상세히 서술되었다.

16세기까지 누룩과 맥아 등은 주로 관아에서 만들어 공급하였지만, 17세기 이후 시전상인 혹은 빈민 중에서 일부가 상품으로 만들어 이익을 남기며 매매하는 예가 많아졌다. 15세기에 편찬된 사시찬요에 기록된 누룩 만드는 법은 조선시대 내내 널리 이용되었다.5)

실내를 누룩의 발효에 적합한 40℃ 가량의 온도로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쉽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누룩을 만든 시기는 1년 중 가장 더운 초복과 말복의 사이였다. 그 가운데 산림경제는 사시찬요를 인용하여 초복 직후에 만드는 것을 가장 좋다고 보았으며, 중복 후~말복 전이 그 다음으로 좋은 시기라고 하였다.6)

18세기 중엽에도 좋은 누룩을 만드는 시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라의 제사에 올리는 술의 맛과 색을 결정하는 것은 누룩과 쌀이었다. 특히 좋은 누룩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는데, 나라에서는 그해 거둔 밀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받아들여 깨끗이 씻어 가루를 만들고, 이것으로 누룩을 만들었다. 누룩은 3복이 걸쳐 있는 6월에 한번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1년의 쓰임새가 되었다. 좋은 재료와 시기를 택해 만든 누룩으로 빚어야 술은 색이 희고, 맛이 좋게 되었기에 나라에서는 일련의 누룩 만들기 과정에 심혈을 기울였다.7)

누룩은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들었다. 특히 잘 발효된 좋은 누룩을 만들려면 일시에 많은 물력과 인력을 동원할 수 있어야 했다. 밀 10말에 밀가루 2말이 누룩을 만드는 단위 작업량으로 그 양이 작지 않았다. 또한 재료는 반죽하여 즉시 밟아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고, 반죽은 단 하루도 재울 수 없었다.

따라서 누룩은 주로 물력과 인력의 동원이 용이한 중앙과 지방의 관청 등에서 만들었다. 관청에서 만든 누룩은 사회적 계층의 사다리를 통해 조선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급될 수 있었다. 연대기 기록과 지방에 거주하던 사족들의 일기에는 누룩의 제조와 유통의 과정에 대해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을 살필 수 있다.

실록에 따르면 성종 24년(1493) 김제 군수였던 최반(崔潘)은 고을에 저장해 두었던 여러 물품을 사적으로 빼돌린 것이 발각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빼돌린 물품에 누룩[麯] 50덩이(圓)가 있었다.8)

『수운잡방』의 ‘누룩 만드는 법[造麯法]애서 누룩을 만드는 기본량은 녹두 3말이라면 밀기울 4말을 쓰는 것이 상례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세기 후반에 내자시(內資寺)에서 만든 누룩(麯子)의 원료로 밀(小麥) 60석, 녹두 1석 9두를 썼다고 한다.9)

16세기 중엽 성주에 유배된 이문건 역시 술이나 식혜를 만드는데 쓸 누룩은 성주목을 비롯한 여러 관청(官廳)에서 구했다.10) 이문건에게 누룩을 보내준 곳으로 경상도의 경상 우병영의 우병사, 성주목·군위현·금산(김천)군·합천군·상주목·영천군·고령군·개령군·함양군의 수령, 충청도와 전라도의 문의현·구례군 수령들이다. 이처럼 다양한 곳에서 많은 양의 누룩을 얻은 이문건은 주로 성주의 배소와 괴산가의 소비에 충당하고, 영당이 있는 안봉사에서 제주를 만드는 데 썼다. 그리고 일부는 성주 인근에 사는 사족인 김시우, 이천서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문건이 얻은 누룩은 주로 국생(麯生)·쌀누룩[米麴]이었고, 이를 양주·양탁주 등 술을 빚는데 쓴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 거주하던 金時遇는 시집보낸 딸이 술을 빚는 데 쓸 누룩을 이문건에게 빌려서 보냈고(1551. 12. 1), 이후 이를 다시 갚는 모습을 볼 수 있다(1554. 11. 4). 이는 이문건이 여러 고을의 수령에게서 구한 누룩이 좋은 맛의 술을 빚을 수 있는 양질의 효모 종자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무렵 예안현에서도 누룩은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경상도 감사 정조(鄭造, 1559~1623) 일가는 예안현감으로부터 누룩 20장(麯 20圓)을 포함한 뇌물을 받고 만족하였다.11) 김령이 보기에 진보현에서 여강서원에 보낸 누룩 20덩이(麴子 20圓)는 매우 후한 물건이었다.12)

누룩과 술을 대중적으로 만들게 된 것은 17~18세기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초 계곡 장유(張維, 1587~1638)는 “농가의 가을걷이로 일으킨 네 수[田家秋興四首]”13)라는 시에서 화전일 것으로 여겨지는 땅에서 보리 농사 짓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여기서 특히 보리를 수확하면 누룩과 엿기름을 만들어 열이나 되는 대식구가 싫증이 나도록 취할 수 있다고 노래하였다. 화전이 개발되고, 이모작이 성행하면서 소농민들 몫으로 돌아가는 곡식이 많아졌고, 농민들도 술에 취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었기에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16세기에 주로 제사에 쓰이고, 사족들이 접대에 사용하던 술은 점차 서민들에게도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이후 이러한 양상은 심화되었고, 18세기 초 왕위에 오른 영조(1724~1776)는 재위 기간 내내 금주령을 강력히 시행하였다. 금주령은 술을 빚는데 필수적인 누룩을 만들고 유통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술을 빚고 마시는 일이 일상화됨에 따라 누룩의 유통이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앙 관청과 각 고을에서 만들던 누룩은 시전의 상인과 빈민까지 만들었고, 그것을 내다 팔아 짭짤한 이익을 누렸다. 반복되는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영조 33년(1757) 서강과 마포 일대의 강민(江民)들이 밀이 새로 익을 무렵 누룩[麯]을 만들어 강 너머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팔아 넘기는 것이 발각되었고,14)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였다.

나라에서 고육지책으로 시전에 누룩 판매 독점권을 주려 했지만 일반 백성들이 만들어 파는 누룩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커다란 반대에 직면하였다. 결국 정조 14년(1790) 나라에서는 난전율을 적용할 대상을 적절히 조정해야 했다. 그 결과 시전 상인[市民]에게 부여된 제조와 판매에 대한 독점권은 10덩어리 이상의 누룩에 국한되었다. 또한 일반 백성들도 10덩어리 미만의 누룩은 사사로이 만들어 팔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15)

이로써 17세기 이래 다양한 맛과 특성을 지닌 술과 누룩을 만들던 관행이 일정한 선에서 법으로 공인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의 전통주가 갖는 개별적 특성이 꽃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Danwon_Byeotajak혜원풍속화첩_주사거배

[그림 2] 17세기 이래 일상화한 음주

: 김홍도(좌, 打作, 국립중앙박물관)신윤복(우, 酒肆擧杯, 간송미술관)의 풍속화

 

누룩 가운데 신국(神麯)은 특히 약재로 사용되는 예가 많았기에 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 의림촬요(醫林撮要) 등의 의서에 기록된 처방전에 주요 약재로 사용되었고,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도 치약(治藥) 항목에 신국이 기재되어 있다.

연산군 5년(1499)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된 구급이해방에서 신국은 중풍(中風)·비위(脾胃)·적취(積聚)·술병[酒病] 등 4가지에 대한 치료방에 신국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초에 편찬된 의림촬요에서는 중풍 예방을 포함하여 24개 이상의 증상을 치료하는 처방전에 포함될 정도로 그 쓰임새가 커졌다.

산림경제에 따르면 6월 6일이 여러 신(神) 들이 모이는 날이기 때문에 그날 만든 누룩을 특별히 신국이라 한다고 하였다. 원대에 편찬된 단계심법을 인용한 이 내용은 15세기 무렵 조선에 전래되었을 것이며, 15세기 이후 신국의 사용이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선조 7년(1574)에 찬 음식을 먹고 소화가 잘 안 되고 식욕이 없던 국왕 선조에 대해 약방(藥房)이 내린 처방은 양위진식탕(養胃進食湯)이었다. 여기에 사용된 약재가 원지(遠志)·백복령(白茯苓)·신국(神麯)·맥문동(麥門冬)·지각(枳殼)으로, 신국이 주요한 약재로 쓰였다.

비슷한 증상에 대한 신국을 사용하는 예는 17세기 중엽 국왕의 총애를 받던 50대 초반 산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발생한 예송이 안겨주는 심적 부담으로 송시열은 큰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국왕은 당시 어의로 있던 안경창(安景昌, 1604~?)을 송시열가에 보내 병증을 살피게 하고, 처방을 내려 치료케 하였다. 어의는 송시열에게 6군자탕(六君子湯) 10여 첩을 연이어 먹도록 처방하였는데, 신국 볶은 가루[神曲炒]와 엿기름 볶은 가루[麥芽炒]를 주요 약재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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