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굶을 수는 있어도 담배를 굶을 수 없다.
담배는 전래된 후 급속히 보급되었다. 담배는 모든 계층에 확대되어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남자건 여자건, 양반이건 천민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담배는 모두 피웠다. 아울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담배를 소비하는데 드는 비용은 부자와 비슷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비용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하였다.
조선 영조 19년(1742)에 빈민들이 흉년을 당하여 먹고 살 수가 없어 관청에서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빈민이 관청에 받은 쌀을 담배로 바꾸어 피우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것이 조정에 알려져 “굶어 죽으려고 하여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것을 도로 담배와 바꾸어 먹다니…” 하면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즉 빈민 중에는 밥을 한끼 굶을 수는 있어도, 담배를 굶을 수는 없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게 되자 그것을 심는 사람도 많아지게 되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아지니, 그것을 심는 사람도 많아진다.(南草 食之者旣多 種之者隨多)”라는 말이 당시에 유행하였다.
농민들은 자신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처음에는 자신의 텃밭에 담배를 재배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피우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담배를 찾는 사람도 많아지게 되자, 곡물을 재배하는 밭에 담배를 재배하게 되었고, 심지어 비옥한 밭에까지 재배하게 되었다. 곡물을 재배하는 비옥한 밭까지 담배를 재배하는 지역이 늘어가자, 조정에서는 관료들이 담배 재배를 금지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법령으로 정하지는 못하였고, 왕이 지방 수령에게 비옥한 토지에는 담배 재배를 금지하는 것을 권하는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한 읍 전체에서 담배를 재배하다
담배를 재배하는 현상은 더욱 확대되어 한 지역 전체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한 읍 전체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전업적인 산지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담배가 전래된 지 100년이 지난 시기에, 전라도 장수 ․ 진안 등의 지역에서 담배를 집중적으로 재배하게 되었다.
영조 9년(1732)에 부승지(副承旨) 이귀휴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왕에게 알렸다.
“신이 30년전에 호남을 왕래할 때에 담배를 재배하는 밭을 보니 울타리 밑의 빈 터에 불과했습니다. 그 뒤 경술년(1730)에 경차관으로서 호남을 왕래하면서 보니 담배를 경작하는 곳이 모두 비옥하고 좋은 땅이었고, 장수 진안 같은 읍은 한 지역의 토지가 거의 담배밭이 되었습니다. 신이 보지 못한 섬 등도 역시 섬 전체에 담배를 심는다고 합니다.”
즉 담배가 전래된 지 100년이 지나자 비옥한 밭에도 담배를 재배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한 지역 전체가 담배를 재배하게 되었을 정도로 담배 재배 지역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에 전라도 진안과 장수지방은 유명한 담배재배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진안은 마이산 아래에 있는데 토양이 담배에 알맞다. 경내(境內)는 비록 높은 산꼭대기라도 담배를 심으면 잘 자라서 주민들은 대부분 이것으로써 생업을 삼는다.” 라고 할 정도로 진안은 토양이 담배 재배에 알맞아 산꼭대기에도 담배를 재배하였고, 대다수의 진안 농민들은 담배를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해 갈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다.
좋은 품종은 왕실에 바쳐지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진안과 장수지방보다 훨씬 품질이 좋은 담배를 생산하는 산지가 출현하였다. 평안도의 삼등과 성천이 그곳이다. 실학자인 유득공(1748~?)이 지은 책에 “평안도의 삼등과 성천 등지에서 나는 담배는 품질이 좋아서 ‘금줄담배(金絲烟)’라고 불리며, 사람들이 그것을 매우 진기하게 여긴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서유구의 아버지인 서호수가 1799년에 편찬한 『해동농서』에서 “현재 평안도에서 나는 담배는 품질이 좋아 서초(西草)라고 불리거나 향초(香草)라고 불린다”라고 적고 있다. 평안도의 삼등 ․ 성천 지방에서 생산되는 담배는 냄새가 좋고 품질이 좋아 다른 지역의 담배보다 가격이 더 비쌌다.
평안도 삼등과 성천지방에서 나는 담배는 왕실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하였다. 담배맛이 좋다고 널리 알려지자, 왕실에서 공물로 징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신들이 선물용이나 비용의 대용으로 담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중국에 사신들이 갈 때 관료나 상인들이 선물과 비용에 해당하는 돈이나 물품을 가져가게 되는데, 그 중에서 인삼과 담배 및 담뱃대 등이 사신단들의 물품에 포함되었다. 1788년에 편찬된 『탁지지』에 의하면, 당시 사신들이 선물과 비용으로 가져가는 담배는 ‘지삼(枝三)’과 ‘진삼초(鎭三草)’ 였다. 지삼은 담배잎을 곱게 썰은 것이고, 진삼초는 진안과 삼등의 연초를 가르키는 것이다. 지삼은 왜지삼(倭枝三)으로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 많았다.
전국적으로 담배 재배 산지가 형성되다
18세기말 19세기 초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담배 재배 산지가 형성되었다. 전라도 진안 ․ 장수 외에도 평안도의 삼등 ․ 성천 ․ 강동 ․ 평양 등이 두드러진 담배 산지로 등장하였으며, 황해도의 신계 ․ 곡산 ․ 토산, 강원도의 금성 ․ 안협, 충청도의 정산, 경상도의 영양 등이 주요한 담배산지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수원 유생 우하영의 『천일록』이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영양의 담배밭
당시에 담배의 품종은 크게 세 가지였다. 최한기의 『농정회요』에는 서초, 남초, 왜연초의 세 종류와 그 특성이 기술되어 있다. “첫째, 서초(西草)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주로 재배되었고, 잎이 얇고 길었으며 맛과 향이 맑았다. 둘째, 남초(南草)는 남쪽지방(주로 전라도)에서 재배되었고, 잎이 두텁고 맛이 탁하였다. 셋째, 왜연초(倭煙草)는 줄기와 잎이 가지와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북한에서는 아직도 성천초를 알아주다
2004년 2월에 남북역사학자들의 학술토론회가 평양에서 있었다. 2월 25일에 “일본해 표기의 부당성에 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와 “일제의 약탈문화재반환을 위한 남북공동자료전시회”가 열려, 나도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 다음 날 덕흥리고분과 강서대묘를 보고 남포의 서해갑문으로 갔다.
서해갑문을 바라보면서, 북한 안내원이 담배를 피웠다. 남쪽의 한 역사학자가 북쪽 안내원에게 물었다. “무슨 담배를 피십니까?” “승천초를 핍니다.” “그 담배를 피면, 하늘로 올라갑니까? 남쪽의 강화도에는 북방에 승천포가 있는데, 고려시기에 그곳에서 개성의 왕궁으로 올라갔지요?” 라고 대답하였다.
“승천초가 아니라, 혹시 성천초가 아닙니까?” 내가 옆에서 거들었다. 북쪽의 안내원이 응대하였다. “승천초가 아니라, 성천초입니다. 북조선에서는 성천초를 알아줍니다.”하면서 담배갑을 보여주었다. 담배 이름이 ‘성천초’였다.
북한에서는 아직도 평안도 성천에서 담배를 생산해내고, 성천초가 좋은 담배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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