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경희궁은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일제가 가장 철저하게 파괴한 궁궐입니다. 한일합병 이후 일제는 경희궁의 정전을 비롯해 모든 전각을 뜯어내서 그들의 절을 짓고 그 자리에 일본 관리의 자제를 위한 경성 중학교를 세웠습니다.
경희궁 자리에 복원된 경희궁 본전, 희정전
해방 후, 경희궁은 <궁궐지>의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경희궁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어요. 현재는 복원된 경희궁의 건물 세 동만 남아있는데 그것도 본래의 위치가 아니라고 합니다. 흥화문과 숭정전, 자정전이 경희궁 터에 있으며 후원 건물이었던 황학정 정전은 종로구 사진동의 옛 등과정 자리에 있습니다.
자정전의 정문인 자정문
복원된 자정전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경희궁의 슬픈 옛 모습
경희궁은 광해군에 의해서 창건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선조대왕의 서자, 즉 후궁의 소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콤플렉스가 있었지요. 또한 왕이 되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다른 무리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때문에 궁궐을 건립하여 왕권 강화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궁궐의 건립은 왕에게 경제력과 인맥을 확보하여 많은 힘을 갖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경희궁의 터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세간에 그곳에 왕기가 있다는 말이 떠돌아서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을 빼앗고 경덕궁(경희궁)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광해군 자신은 반대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어(인조반정) 이곳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 이후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으로 창덕궁, 창경궁이 파괴되어 인조는 경덕궁(경희궁)에서 10여년을 지냈으며, 현종 또한 재임기간 동안 이곳에서 지냈어요. 숙종은 경덕궁(경희궁) 회상전에서 탄생했습니다.
숙종임금이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맞아 들여 세론이 들끓던 동안에도 경덕궁(경희궁)에 머무셨고 숙종 43년 왕세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나서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영조 때 와서야 경희궁으로 명명하였고, 이곳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정조와 철종은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습니다. 이처럼 많은 임금님들의 역사가 남아있던 경희궁이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니 너무 애통합니다.
경희궁으로의 복원은 쉽지 않은 일로 보입니다. 지금 경희궁 터에는 큰 건물들과 서울시립 미술관, 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놓여있는 흥화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은 구세군 건물 자리라고 합니다. 복원된 금천교는 궁궐이 아닌 서울시립 박물관 앞에 위치하고 있고요. 경희궁의 옛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몹시 안타깝습니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경내에 있던 정각원으로 쓰다가
1985년 이후의 복원 계획에 의해
제자리에 복원되었습니다.
유일한 후원, 황학정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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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의 탄생
1984년 서울시에서 공원을 조성하기 위하여 경희궁터를 사들였고 근정전을 중심으로 발굴 조사하여 그 주위 전각들을 일부 복원하였습니다. 내전과 동궁, 생활기거 공간, 내원등 대부분의 구역에 지하 1층과 지상 3층에 4개의 전시실을 꾸미어 2002년 5월 21일에 개관하였습니다. 조선의 수도 서울, 서울 사람의 생활, 서울의 문화, 도시서울의 발달로 전시를 구성하였으며, 서울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도시역사 박물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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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옛 모습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정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고려의 수도는 송악(지금의 개성)이었어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은 474년 간 통치한 왕씨로부터 다른 성을 가진 이씨에게 왕의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성을 바꾼 혁명’이라는 뜻으로 역성혁명이라고 합니다. 개성에는 고려에 충성하는 옛 신하들이 많았으므로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한양은 풍수지리상
어떤 점이 좋을까 한편 살펴볼까요?
1. 한양은 중앙이 평탄하고 사방이 높습니다.
2. 혈의 뜰 앞에는 넓은 명당이 있습니다.
3. 물이 흘러가는 곳이 바깥쪽에서 볼 때
산으로 가려져있습니다.
4. 뒤쪽에 있는 백악산이 적절히 높습니다.
5.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한양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6. 산맥의 방향과 하천(청계천)의 방향이
엇갈림의 관계를 이루고 있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