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뱃대의 길이로 신분을 알 수 있다.
흡연의 천국 시대
16세기 말 17세기 초 담배가 전래되는 시기에는 흡연의 천국시대였다. 담배가 전래된 초기에는 흡연의 보급 속도가 빠르고, 그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누구나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6살 어린아이부터 70세된 노인에 이르기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양반은 물론이고 평민 심지어 천민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은 당시의 양반층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시대는 신분제사회이었고, 신분간의 차별이 뚜렷하였던 시기였다. 양반과 평민이 입는 의복이 달랐으며, 집의 규모(몇 칸이냐?)와 재료(초가집이냐, 기와집이냐?)의 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담배만은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피울 수 있었으니, 당시 천대받고 있었던 천민이나 여자들이 양반 내지 남자들과 맞먹으면서 담배를 피우는 기분이란 말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담배를 누구나 똑같이 피운다는 사실은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형태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신분제도에 따른 담배문화의 형성
17세기 후반 주자학이 강화되면서 가부장제적 질서가 심화되었다. 유교적 예속이 향촌사회와 가족제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이전의 외손봉사(外孫奉祀:시집간 딸이 제사를 지내는 것)와 윤회봉사(輪回奉祀: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 대신에 적장자(맏아들)에 의한 사대봉사제(四代奉祀制: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의 4대를 제사지내는 것)가 정착되고, 자녀균분상속제로부터 적장자 상속으로 가부장제적 질서가 강화되었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양반층들이 평민과 천민층이 담배피우는 행위를 금지하지는 못하였지만 담배피우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신분간의 차별을 엄격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담배를 피우는 행위에도 신분간의 구별을 엄격히 규정하는 규율과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신분제 및 가부장적인 권위체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담배에 대한 예절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관습으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체계화되었다.
유득공(1749 ~?)의 『경도잡지』에는 당시에 행해졌던 구체적 내용의 일부가 전해진다. “비천한 자는 존귀한 분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고 하거나 “조관들이 거리를 지나갈 때 담배를 피우는 것을 금지하기를 매우 엄격히 하여, 재상이나 홍문관 관원이 지나가는 데 담배를 피우는 자가 있으면, 우선 길가의 집에다 구금시켜 놓고 나중에 잡아다가 치죄한다”고 하였다.
그러한 관습은 체계화되면서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게 된다. “아버지와 형님은 물론 연장자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연장자를 만났을 때 담뱃대를 눈앞에 보이는 것은 실례이니 곧바로 뒤로 감춘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 담배를 피지 않는다.” “상놈은 양반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등의 여러 관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항은 법률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관습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오게 되었다.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에 비례
신분에 따른 담배문화의 형성은 담뱃대의 사용에서도 나타났다. 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입에 물고 빠는 물부리, 그리고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며, 설대가 긴 것을 장죽,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을 곰방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담배가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까닭에 초기의 담뱃대 역시 일본의 양식이 전래되어 담배통도 작고, 설대도 짧았다.
그러나 양반들은 평민과 구별짓기 위하여 긴 담뱃대를 사용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2~3m나 되는 담뱃대를 사용하고 하인이나 노비로 하여금 불을 붙이게 하였다. 그것으로 평민과 구별짓도록 하였고, 긴 담뱃대를 재떨이에 딱딱 떠는 소리로 권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18세기 풍속도에는 담배통이 커진 장죽이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울 경우 혼자서 담배통에 불을 붙이면서 물부리를 빠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불을 붙이는 하인이 딸리게 마련이었다. 즉 장죽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은 양반층을 비롯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계층에 국한되고, 일반 상민은 곰방대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 양반층 가운데서도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은 백통이나 오동으로 담뱃대를 만들고 금이나 은으로 무늬를 넣어 치장한 장죽을 사용하기도 했다. 나아가 양반들은 담뱃대뿐만 아니라 담배통을 은이나 금으로 치장하여 평민과 구별 짓고자 하였을 뿐 아니라 멋을 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담뱃대의 길이와 재질을 보면 그 소유자의 신분을 가늠할 수 있었다.
‘호랑이가 담배피우는 민화’에 담겨 있는 숨은 뜻
조선후기에 등장하는 민화 중에는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내용의 그림이 많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시작할 때 항상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에…’로 시작한다. 그것은 가장 오랜 시절의 일을 뜻하면서, 아주 먼 옛날에는 신분이 없어서 평등하고 자유스러운 시기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울러 호랑이가 담배피우는 민화에 담긴 의미는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마음대로 담배를 피웠던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워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담배가 전래된 초기에는 누구나 담배를 자유스럽게 피웠으며, 심지어는 왕 앞에서도 신하들이 담배를 피웠다. 야사에 “조정에서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하다가 의논이 막히면 담배만 자꾸 태우게 되는데, 연기라는 것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어서 높은 자리에 앉은 임금에게로 자꾸 가게 되니, 그것을 참다못한 임금님이 높은 분이 있는 데에서는 담배를 삼가라고 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초기에는 평민들도 양반과 똑같이 담배를 피웠고, 맞담배질을 할 수 있었다. 신분간의 차별이 큰 사회에서 담배를 같이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은 평민들에게 큰 위안을 주는 행위이다.
조선전기의 사회에는 평민들이 성리학적 조선왕조의 사회가 이상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인식을 양반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었지만, 조선후기의 사회에는 평민들이 점차 조선왕조의 사회가 불평등한 사회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사회, 경제, 사상적으로 조선왕조의 중세적인 사회체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평민들은 자신들이 고생을 하고 불평등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 갔다. 그리하여 평민과 평민의 입장을 이해하는 지식인들은 소설 등의 문학, 풍속화 등의 그림, 판소리 등의 여러 형식으로 당시의 불평등한 사회상을 비판하면서 이상적인 사회상을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민화’가 출현하였고 거기에는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는 시절 즉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담배를 피웠던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워하는 속내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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