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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과 인사동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1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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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용감 터 / 사포서 터


- 제용감 터

서울시 종로구 중학동 54번지

제용감은 조선시대 관청으로,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했습니다. 중국에 바치는 모시, 마포, 피물(동물의 가죽), 인삼 등의 진상과 국왕이 사용하는 의복, 사라능단(얇은 비단과 두꺼운 비단을 통틀어 칭함), 포화(삼베, 모시, 무명, 면주 같은 물품화폐로 쓰인 직물들)에 색을 입히고 물감을 들이는 직조 등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았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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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용감 터


1392년(태조1)에 설치한 제용고를 1409년(태종9)에 제용감으로 고치고, 1461년(세조7)에 도염서를 병합하여 염직에 관한 일도 맡아보았습니다. 1894년(고종8) 갑오개혁 때 폐지하였다가 1904년(광무 8)에 제용사로 고쳤는데, 1905년에 다시 폐지하였습니다.


- 사포서 터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로 나와 석탄회관을 지나 조세박물관 왼쪽 화단

사포서는 조선시대 왕실 소유의 채소밭과 과수원을 관리하며 궁중에 채소와 과일을 공급하던 관청입니다. 궁궐 안의 대전, 중궁전 등에서 쓰는 채소를 공급하고 각종 제향 때 채소전과 원포(과일과 채소 등을 심는 밭)를 관리했습니다.

사포서 외에도 환관들이 관리하는 내농포가 있어서 사포서처럼 궁중으로 채소를 납입했다고 합니다. 사포서는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조선 전시기에 걸쳐 계속되어오다가 1882년(고종19) 일부 관제 개편에 따라 혁파되었습니다. 이 사포서는 처음에는 북부 준수방(종로구 통인동)에 있다가 중부 수진방(종로구 수송동 116번지)로 이전되었습니다.


- 제용감과 사포서가 속해 있던 호조에 대해 알아볼까요?
 
호조는 인구 조사와 세금, 나라의 살림살이에 관계된 일을 맡아보았던 곳입니다. 지금의 기획재정부, 지식경제부와 국세청 등을 합친 역할을 했습니다. 호조는 판적사, 회계사, 경비사 세 곳으로 나뉘어 업무를 보았습니다.
 
판적사에서는 호구 조사, 토지, 부역, 조세에 관한 일, 흉년에 곡식을 빌려주는 일 등을 맡아보았고, 회계사에서는 서울과 지방 관청에 비축된 물건의 양을 관리하고, 한 해의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는 일을 했습니다. 경비사에서는 서울에서 치르는 국가 행사에 쓰이는 경비, 왜인(일본인)들에게 주는 식량의 지출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습니다.

제용감 관아 터는 원래는 고려 말 이성계 역성혁명의 일등공신 삼봉 정도전이 살던 집터의 일부였습니다. 정도전의 집터는 매우 넓어 남쪽으로는 현재의 종로구청 터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중학동, 동쪽으로는 현재의 연합뉴스터 일부에까지 걸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은 2011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중심이 되어 시민 모금운동을 벌여 서울시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세운 동상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세운 것입니다. 당초 표석 형태를 구상하였으나 당시 종로구청장인 김영종이 비석 대신 소녀 모습의 예술작품 아이디어를 제공해 김운성‧김서경 부부 작가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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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은 높이가 130cm이며, 치마저고리를 입고 짧은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의자에 앉은 채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군에 끌려 갔던 14~16세 때의 모습을 재현한 것입니다. 평화비 표지석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가 직접 쓴 '평화비' 문구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2011년 12월 14일 1,000회째를 맞이함에, 그 숭고한 정신과 역사를 잇고자 이 평화비를 세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이후 국민 모금 등으로 전국 27곳과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립공원 등 해외 3곳에도 세워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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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의 그림자

조각상은 소녀인데 바닥의 그림자는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이는 같은 사람인데 기나긴 시간이 흘러 소녀가 할머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지나온 시절 할머니들의 원망과 한이 서린 시간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 그림자 속의 하얀 나비

나비의 상징적 의미가 환생을 뜻하므로, 부디 나비로라도 환생해 원하시던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할머니 그림자 가운데 하얀 나비를 새겼다고 합니다.


- 단발머리

당시 조선 소녀는 머리에 댕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머리카락을 신체의 일부분으로 소중하게 여겨 함부로 짧게 자르지 않았습니다. 조각상의 뜯긴 머리카락은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낳아주신 부모와 내가 자란 고향으로부터 억지로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 맨발

소녀의 발은 맨발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거나, 조선 땅에 돌아와서도 평생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본인이 지은 죄도 아닌데 못할 짓을 한 것처럼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할머니들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 새

새는 보통 자유와 평화를 상징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할머니들의 그 마음만은 남아서 우리 모두와 영원히 연결되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 빈 의자

빈 의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억울하게 세상을 먼저 떠나신 할머니들의 빈자리를 쓸쓸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곳 일본대사관을 찾는 사람들이 소녀상 옆 빈자리에 나란히 앉아, 당시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들의 심정을 헤아려보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되새겨볼 수 있는 체험공간으로 마련된 것입니다.



충훈부 터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 인사동길 입구

충훈부는 조선시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이나 그 자손을 대우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관청입니다. 1392년(태조1)에 설치되었는데, 본래는 공신도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태조 때 설치되어 개국공신에게 영작(영예로운 작위)과 노비들을 주고, 그 자손들에게도 영예(영광스러운 명예)와 음덕(남에게 알려지지 아니하게 행하는 덕행)이 들어가게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충훈부는 조선시대 공신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던 관청입니다. 공신의 책봉과 예우, 공신 사망 때의 예장, 공신 및 공신 자손의 회맹연 주관, 공신 자손의 관리와 천거 등과 같은 일을 맡아본 곳입니다. 이를 위해 정규 관원 외에 서리와 고직, 사령, 문서직 등의 실무자를 배치하였고, 관청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둔전이나 어장, 염전 등 충훈부에 딸린 재산을 관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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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공신 책봉

조선시대에는 개국공신 등 28차례 공신 책봉이 있었다. 이들 공신의 조상에게는 중직하고 당사자는 군(君)으로 책봉하며, 공신 호칭을 부여하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했다. 또 후손에게는 면책 특권을 부여하였다. 공신 책봉이 있은 후 공신들은 맹단(盟壇)에서 모여 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고 공신 사이의 유대 관계를 확인하는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였으며, 이어 회맹연(會盟宴)을 베풀곤 하였다. 왕은 회맹제에 직접 참여하거나 회맹제에 선온(宣醞)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회맹제를 마친 공신을 궁궐 안으로 불러 회맹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중앙교당.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

천도교는 동학을 바탕으로 하여 최시형이 순교한 뒤 손병희가 발전시킨 민족 종교입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18년 4월 5일 천도교 부구 총회에서 새로운 교당을 짓기로 하여 그해 12월 1일에 개기식을 하고, 1919년 7월에 착공하여 1921년 2월에 준공했습니다. 규모는 대지 1,824평에 건평 212평으로, 기초는 화강석으로 하고 벽은 붉은 벽돌로, 지붕은 철근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지었습니다. 전면에 2층 사무실을, 그 위에 탑 모양의 바로크풍으로 높이 올렸습니다. 수용 인원은 800명에서 1,000명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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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 선생님은 처음 건평 400평 규모의 대교당을 계획하고 당국에 건축허가를 신청하였지만, 조선총독부는 교당이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것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구실을 붙여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규모를 절반으로 줄여서야 겨우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총공사비는 교인 1호당 10원씩을 목표로 성금을 모아 약 30만원을 모금하여 충당하였는데, 공사기간 중 시공자인 장시영의 구속과 자재 구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석재는 창신동 석산에서 채취하였고, 붉은 벽돌은 구입하는 데 애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천장의 앵글 철재는 미국에서 수입했다고 합니다. 총건축비는 22만원, 사무실까지 해서 27만원이 들었고, 나머지는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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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호국 보훈의 달입니다.


호국보훈이란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의 호국(護國)과 ‘공훈에 대해 보답한다’는 뜻의 보훈(報勳)이 합쳐져 생긴 말입니다. 즉,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함으로써 그분들의 공로에 보답을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현충일은 왜 6월 6일일까요?

고려 초기의 왕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거란의 침입으로 전쟁을 겪어야 했는데, 그 후 1014년(현종 5년), 24절기상 망종에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장병의 유골을 각자의 집으로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망종이 6월 5일이나 6일 정도이기 때문에 전사한 장병을 기리던 역사를 이어서 6월 6일을 현충일로 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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