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철도 이야기
자력건설운동의 보루, 호남철도
“비내리는 호남선 마지막 열차 ···”
누구나 노래방에서 한번쯤은 불러봤음직한 노래가사다. 바로 남행열차의 첫 소절이다. 남행열차는 목포만 지나는 열차는 아니지만 그 종착역이 목포에 있어 곧 목포의 또 다른 상징이 되고 있다.
남행열차는 목포의 생활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았고, 목포를 서남단의 고립된 도시가 아닌 상업의 요지로 키워준 것도 뭐니뭐니해도 이 남행열차였다. 이 남행열차의 옛 이름이 호남철도이고 그 전 이름이 경목(京木)철도였다.
우리는 경인선, 경부선 등 주요한 모든 철도를 일본이 세운 것으로 안다. 물론 호남철도의 전통도 1914년 1월에 이루어졌으니 우리가 세웠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강점되기 전에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호남철도를 부설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그런 일은 그 존재조차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하건대 호남철도는 우리 민족이 벌인 자력건설운동 최후의 보루로서 그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하다.
대한제국에 들어오면 철도의 이권을 옹호할 뿐 아니라 그 부설의 필요성을 인정해서 적극 추진해 나갔다. 그 최초의 시험선이 경목선(京木線)이었다. 이 문제는 1898년 6월 18일 논의하고 다음날 재가되었다. 7월 6일에 철도사(鐵道司)를 설치했고, 7월 27일에는 철도사를 1등국인 철도국으로 개칭하였다. 이처럼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해 나갔다.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외국의 차관조차도 거절했고, 어디까지나 자력 부설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자금사정으로 여의치 못하던 중 1904년 6월에 서오순(徐午淳)에게 부설권을 허가하였다. 이때 경목철도의 이름이 호남철도로 바뀌었다. 호남철도는 정부 및 민간인에 의한 철도부설운동 중 그때까지 남은 유일한 것이었다. 강점을 앞둔 우리 민족이 마지막으로 또 가장 활발하게 추진한 자력건설운동의 보루가 호남철도였던 것이다.
호남철도는 두 차례의 측량사업을 추진하는 등 가시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또 고종의 지지에 힘입어 경성유력실업인들이 주식모집활동에 참여하면서 토목작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후 자금문제에 봉착했을 때 호남철도주식모집연구회가 개최되어 다시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때의 주식자금은 경성실업인들의 협조, 지방봉건관료조직과 지주들을 동원한 강제 모집방식을 취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그래서 준공 계획까지도 세울 만큼 진전을 보였다. 계획에 따르면 1909년 4월부터 시작하여 1912년에 준공하기로 예정하였다. 3년이란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추동으로 1908년 11월경 당시 내무대신 송병준(宋秉畯)이 전라남북도에 비밀훈령을 발하여 관찰사가 주식모집운동에 관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의 방해하고 나섰다. 이로 인하여 호남철도 부설운동은 마침내 파국을 맞았다. 마침내 부설권의 인허가 취소되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호남철도 부설의 인허를 취소한 후 일본은 일방적으로 정한 실비배상액 12만 9천원을 서오순에게 주고 인수를 매듭지어 버렸다.
호남철도주식회사 창립위원의 청원서를 보면 그때 이미 철도야말로 나라를 부강케 하는 최선책임을 주장했고, 국가의 혈맥일뿐 아니라 나라의 독립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까지 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호남철도 부설운동의 실패는 나라의 독립을 잃는 일과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호남철도는 강점 직후인 1911년 3월 15일 기공해서 1914년 1월에 완공하였다. 3년만에 완공된 셈이었다. 3년이란 짧은 기간에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일본의 졸속주의의 영향이 크겠지만, 애당초 호남철도부설운동 당시 예정된 준공기간이 1909년 4월에서 1912년까지 3년간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결코 빠른 기간도 아니었다. 따라서 부설운동기의 준비가 큰 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부설운동은 비록 실패했으나 그 기초를 힘이 다할 때까지 민족의 힘으로 이루려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음을 다시 한번 짚어 두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목포역>
20세기 초에 그것도 3년만에 완공된 호남철도가 1968년 복선화가 시작된 이래 30년이 지난 지금도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호남푸대접의 티를 내며 달리는 호남선 열차, 언제나 그 티를 벗어낼 건가? 그래서 여전히 남행열차는 다정한 우리의 노래로 남아 있으리라.
호남선 복선화, 3년 공사가 36년 걸려
호남 푸대접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것은 3년 공사가 30년이 넘어서야 완공된 호남선 복선화공사이다. 호남선 복선화는 일찍이 1968년 한해 극복을 위한 자조(自助) 권노(勸勞)사업으로 목포에서부터 직선으로 해 올릴 계획이었다. 목포상공회의소에서도 교통부와 철도청에 철도수송 수요에 상응한 수송장비 확보를 위한 건의서를 제출하면서 호남선 복선공사를 목포역에서부터 착공토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는 묵살되었고 다만 호남선 복선을 목포까지 연장한다는 맥 빠진 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언제 실현될지 모를 아득한 빌 ‘공(空)’자 ‘공약(空約)’이었다.
호남선 복선화 공사는 그동안 선거 때마다 수차례 공약으로 제시됐지만 지지부진했다. 지난 1978년 서대전에서 익산간 87.9㎞를 개통한데 이어 1988년 익산-송정간 97.8㎞ 구간을 개통했고, 2001년 7월 송정-일로 구간에 이어 마침내 2001년 12월 17일 무안군 일로역 광장에서 호남선 마지막 구간인 송정-임성간 복선화 개통식을 가졌다.
송정-목포 구간 70.6km 복선화 사업은 1995년 9월 착공되었는데 공사완공 기간이 최초 1997년에서 2000년 그리고 다시 2002년으로 연기되었다. 목포까지의 완전한 준공은 결국 2004년 4월로 미루어졌지만 송정-임성간 복선화 개통식은 사실상 복선화의 끝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일제강점기만큼이나 긴 36년의 세월이 걸렸다. 100년 전 호남선 건설 기간이 3년이었는데 그 옆에 선로 하나 더 놓는데 걸린 시간이 36년이라면 이를 누가 차별이 아니라 할까?
어쨌든 그 한 많은 복선화사업이 이제 막을 내렸다. 호남선 복선화는 전라도민에게는 이렇듯 상징적인 사건이었지만 중앙 일간지 어디서도 호남선 복선화의 사실상 완공을 보도하는 기사는 없었다. 다만 지방판 한 구석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또 한번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이제 목포 도심을 통과하는 임성-목포간 연장 7.4㎞까지도 완공되어 2004년 4월 1일 고속철도의 시대를 열었다. 역시 경부선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서울에서 목포까지 3시간이면 된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개통이 가져다 준 변화 못지않게 이 고속철도의 개통이 가져다 줄 변화에 대한 기대 역시 크다. 다만 그 기대는 준비한 노력만큼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