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지방사”와 “지방화된 전국사”
지방사의 지위와 성격에 대한 견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방사는 전국사, 국가사의 부분사이며, 따라서 지방사 연구는 전국사, 국가사 연구에 종속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지방사는 전국사, 국가사의 체계와 내용을 채울 수 있는 자료와 연구 성과를 제공하는데 기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지방사를 전체사의 일부분 혹은 보조학으로 보는 견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지방사는 국가사 연구를 위한 수단도, 초보적인 역사도 아니다. 국가사와 지방사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만, 전혀 다른 사회적 실체를 취급하는 별개의 연구분야라고 주장한다. 이때 전자의 견해를 “지방화된 전국사(National history localized)”라 하고, 후자의 견해를 “본래의 지방사(Local history per se)”라 구분한다.
지리적으로는 지방이지만, ‘중앙’의 역사와 ‘직접’ 관련이 있어 연구대상이 되었고, 또 그런 관심에서 연구했다면, 그 연구는 ‘지방사’라기보다는 ‘중앙사’의 일부가 된다. 이런 연구야말로 말 그대로 “지방화된 전국사”인 것이다. ‘사례연구’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례연구는 전체사적 관점에서 어떤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특정 지방의 관련 소재를 택하는 것일뿐, 그것을 통해 그 지방의 정체성(identity) 또는 고유성을 밝히려는 연구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방화된 전국사”가 가치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본래의 지방사”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한편 “본래의 지방사” 연구란 지표면상의 일정 공간을 토대로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 왔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모든 유·무형의 자취들, 즉 문화를 종합적으로 분석, 고찰하여 그 공간을 보다 나은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기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지방적인 특수성을 연구함으로써 그 안에서 보편적인 역사적 의의를 발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겉보기에 똑같은 사례연구라도 그 목적이 국가사의 일반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그 지방 자체의 지방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냐에 따라 각각 “지방화된 전국사”와 “본래의 지방사”로 구분된다. 말하자면 “사례연구로서의 지방사”와 “전체로서의 지방사”로 구분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래의 지방사”라고 해서 국가사와 전혀 무관한 연구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지방사는 지방의 독자성을 기초로 하되 국가의 전체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즉 자기 충족적인 입장에서 독자성을 최대로 살리되, 전체 국가사의 기초로서의 의미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지방사에 대한 이런 이해는 1948년 창립하여 지방사 연구의 메카다 된 영국의 레스터대학 지방사학과(Department of English Local History at University of Leicester)의 견해이기도 하다. 이들은 “지방사 = 지방공동체의 역사(history of local community)”라고 전제하고, 지방사의 정의를 “지방공동체의 전체사 즉, 그 지방 공동체의 기원, 성장, 해체를 연구하는 역사”라고 정의한다. 이런 의미의 지방사는 호남의 경우에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
지금까지 “호남의 역사”라고 해 봐야, 기껏 “한국사 일반”에서 사례연구로 다루어진 사건들을 엮어 놓은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법으로 보다 새롭게 쓰여 져야 한다. 이제 조금 시도하고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 지방사 연구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꼭 넘어야 할 일이다. 이번 작업이 거칠지만 “본래의 지방사”로서 호남지방의 역사를 재정립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망원경만이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지식을 증진시키는 수단은 아니다. 현미경도 꼭 같이 중요한 수단이다.”라는 핀버그(Finberg)의 말을 인상 깊게 새기며….
제대로 알기와 제대로 알리기
예전에는 단지 ‘지방화시대’라는 구호로만 들떴던 지방이 참여정부가 들어선 지금,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 등등의 정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방은 단지 중앙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동력으로 그 중요성이 새삼 주목되고 있다. 물론 그 동력의 토대는 지방사람들이다. 따라서 지금 지방사람들에게는 지방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자긍심, 자부심을 갖는 일이 꼭 필요하다. 이때 무엇으로 그들의 정체성, 자긍심, 자부심을 갖게 할 것인가? 그건 바로 역사이고 지방을 주인으로 한 지방사인 것이다. 따라서 지방사 연구의 또 다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곧 정체성 확보를 위해 <지방사 제대로 알기>와 <지방사 제대로 알리기>에 있다. 스스로를 찾고 스스로를 알리는 그런 작업이 새삼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를 통해 문화적 정체성을 갖는 일은 지방경쟁력의 토대가 된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알고 제대로 알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사료의 확보다. 사료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료로부터 영양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쓰러지는 나무처럼 역사 역시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 사료가 있음으로 지방사 연구가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지방사 연구가 활성화하여야 사료가 보존된다. 그러므로 사료의 풍부함은 지방사 연구의 활성화를 가져오고 이는 곧 그 지방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켜 이미지를 높이는데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 동시에 사료의 상실은 역사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한편 지금, 사료는 단순히 문헌에 그치지 않는다. 일상성을 밝히기 위한 소재의 하나로 생활사를 연구한다고 할 때 사료의 범위는 한없이 넓어진다. 구술사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료가 될 수 있다.
또 지방사를 외면하는 기존 연구 풍토도 극복되어야 한다. 학문과 문화의 중앙집중화로 지방문화를 외면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은 아무리 지방사 연구의 새로운 의미를 주장해도 중앙에서 보기에는 여전히 향토사가일 뿐이다. 이런 인식을 불식시키는 작업은 물론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고 주목받는 연구 성과를 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또한 주목받을 수 있는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만큼 지방사 연구가 궤도에 올랐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지방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민족문화의 올바른 이해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지방사 연구는 다른 지방의 연구와 대립적이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여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제대로 된 지방사 연구가 쌓일 때 전체사, 국가사 또한 튼튼한 기초를 갖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