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슴슴 얼얼! 어허, 시원한 평양냉면!
평양 대동강변 옥류관 냉면국수 위에는 계란 지단을 곱게 썬 고명과 고기 조각이 얹혀있었다. 꿩고기 지단 두 개도 얹혀있었다. 안내원은 먼저 고명을 들고 국수에 초를 약간 넣어서 냉면을 말아먹으라고 했다. 냉면국수를 입에 넣는 순간의 묘한 맛과 상쾌함과 깨끗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식품을 가지고 이런 맛을 낼 수 있을까? 국물은 깨끗하고 맑았다. 안내원에게 어떻게 그런 냉면국물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도 모르는데 쇠고기와 돼지고기, 꿩고기를 비례에 맞추어 육수를 내고, 거기에 잘 익은 동치미국물을 섞어서 맛을 낸다고 들었다. 옥류관의 냉면 맛 비결은 육수에 있는데, 딱 두 사람만이 이 맛을 낼 줄 알고, 그 비법은 다음 세대로 전수 된다”고 했다.
– 김숙희 박사의 <무얼 어떻게 먹지>에서
고깃집 후식도 냉면을 찾는 우리들
세상이 온통 찜통이다. 아우성이다. 질질 비지땀이 흐른다. 그렇다. 이럴 땐 냉면이다. 사각사각 얼음국수다. 한국 사람은 고깃집에서 갈비를 뜯고도 꼭 냉면으로 입가심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른바 ‘고깃집 냉면’이다. 육수가 들척지근하고 조미료 맛이 난다. 다방커피 같다. 면이 가늘고 질기다. 한번 입에 물면 면발이 끝날 때까지 후루룩거려 목구멍으로 넘겨야 한다. 아니면 앞니로 잠시 문 채, 안쪽 어금니로 뒤쪽 면발을 슬근슬근 갈아 넘기는 수밖에 없다. 앞니 사이에 꽉 끼어 나부대는 면발도 있다. 그렇다. 고깃집 냉면 면발은 메밀이 아니라 감자전분인 것이다. 무늬는 평양냉면인데 속은 함흥냉면이다. 들척지근하고 커다란 얼음 동동 떠다니는 맛으로 먹는다. 얼씨구! 가끔 걸쭉한 트림까지 나온다.
이 계절엔 냉면이나 얼음국수지
제대로 된 평양냉면은 아버지의 맛이다. 무심한 듯 속정이 깊다. 밍밍하면서도 은근하다. ‘담담하고 슴슴한 이 맛, 핏물 걸러낸 곰국처럼 눈 맑은 메밀 맛(장옥관 시인)’이다. 국물 맛이 맑고 깨끗하다. 뒷맛이 담백하고 개운하다. 역시 대미필담(大味必淡)이다. 최고의 맛은 반드시 담백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기꺼이 ‘평뽕(마약 평양냉면)’에 중독된다.
냉면은 원래 북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냉면집 이름에 ‘평양’이나 ‘함흥’이 붙지 않으면 뭔가 빠진 것 같다. 주인도 실향민들이 대를 이어 하는 곳이 많다. 칼바람 쌩쌩 몰아치는 한겨울, 쩔쩔 끓는 아르궅(아랫목)에서 새참이나 야식으로 먹었다. ‘쨍한 맛’ ‘거칠고 시원한 맛’ ‘뭔가 죽었던 세포를 우우 일어나게 하는 맛’ ‘시원 텁텁 이상야릇한 맛’에 다들 넋이 나갔다. 한겨울 아이스크림 맛이 어찌 감히 비교가 될까? 얼음이 동동 뜬 김치말이 밥이나 김치말이 국수도 마찬가지 음식이다. 입안이 얼얼한 댕추가루(고춧가루)와 탄수(식초)를 치고 산꿩 고기를 고명으로 얹는다. 동치미국물 육수는 들큼하고 슴슴하며, 텁텁하다. 조선 고종황제도 동치미국물에 메밀면을 말아 편육과 배 잣을 얹어 먹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1 912∼1995 <국수>에서
메밀가루와 밀가루의 비율은 영업비밀
냉면은 메밀면을 쇠고기국물이나 동치미국물에 말아먹는 음식이다. 역시 메밀면을 쓰는 막국수와는 사촌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식 소바나 진주냉면도 메밀면을 쓴다는 면에서 비슷하다. 일본 소바 식당에선 메밀가루와 밀가루의 비율을 중시한다. 보통 8:2의 비율을 황금률로 여긴다. 식당마다 그 비율을 정확하게 표시하고 손님들은 각각 입맛에 맞는 집을 찾는다. 그 비율에 따라 목구멍에 넘어갈 때의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사람들은 메밀국수 면발을 목구멍에 넘어갈 때까지 끊지 않는다. 그 식감을 즐기는 것이다.
한국 평양냉면집이나 막국수집에선 메밀가루와 밀가루 혹은 전분 비율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대충 얼버무린다. 국산메밀인지 중국산메밀인지 혹은 중국산 메밀일지라도 빻은 것을 들여오는 지 아니면 통메밀을 들여와 국내에서 빻은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냉면 맛은 결국 메밀 맛이다. 메밀을 공장에서 빻았는지 아니면 가정에서 빻았는지도 맛을 다르게 한다. 방금 전에 빻은 메밀일수록 그 맛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잘 나가는 집들의 육수비법
요즘 서울의 평양냉면은 대부분 사태나 양지 등을 삶아 우려낸 고기국물을 쓴다. 평양식 동치미국물은 거의 쓰지 않는다. 변덕스런 동치미국물에 육수 맛이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이다. 육수에 동치미국물을 섞는 곳은 서울 다동의 남포면옥(02-777-2269) 정도다. 조선시대엔 자줏빛 오미자국물을 쓰기도 했다. 경남진주의 ‘진주냉면(055-741-0525)’집의 해물육수(멸치, 새우, 홍합, 바지락, 황태에 채소와 과일을 섞음)정도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진주냉면 집은 한때 대학조리학과교수가 육수비법을 훔치려다가 적발돼 화제가 됐던 곳이다. 냉면 고명으로 소고기전(육전)을 얹는 것도 독특하다. 육수도 남쪽답게 간간하다. 북쪽 김치가 시원 담백하고, 남쪽 김치가 걸쭉 짭짤한 이치와 같다.
평양냉면 4대 천왕
서울 장안엔 ‘평양냉면 4대 천왕’이 있다. 고깃집냉면이 다방커피라면, 이곳은 별다방, 콩다방의 에스프레소인 셈이다. 언제 가더라도 중절모 차림의 이북말씨를 쓰는 할아버지들로 북적인다. 서울 평양냉면 4대천왕은 을지로4가의 우래옥(02-2265-0151), 을지로3가의 을지면옥(02-2266-7052),충무로의 필동면옥(02-2266-2611), 장충동의 평양면옥(02-2267-7784)이다. 거의 한 동네에 끼리끼리 모여 있다. 동대문시장 일대 상인 중에 실향민이 많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닭무침으로 이름난 남대문시장의 부원면옥(02-753-7728)도 비슷하다.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은 1970년대 개업한 의정부평양면옥의 큰딸과 둘째 딸이 떨어져 나와 문을 연 곳이다. 서울강남의 본가평양면옥(02-547-6947)은 막내딸이 운영한다. 의정부면옥 본점(031-877-2282)은 큰 아들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4대천왕 모두 육수가 밍밍하고 담백한 편이다. 면발도 메밀함량이 많아 툭툭 끊어진다. 메밀과 전분비율은 약간씩 차이가 있다. 대체로 면발이 구수하고 투박하다. 메밀냄새와 면발의 꺼끌꺼끌한 맛이 좋다. 하지만 집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래옥(육수와 꾸미 모두 한우만 사용)과 평양면옥은 육수 맛이 약간 강하고, 필동면옥은 냉면에 고춧가루를 듬뿍 쳐서 나온다. 제육이 일품이지만, 요즘은 옛날만 못하다는 불평도 있다. 을지면옥은 메밀 삶은 면수(麵水)가 좋다. 조선간장과 고춧가루를 조금 쳐서 쭉 들이키면, 술꾼 해장국으로는 그만이다. 평양면옥은 통메밀을 직접 제분한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면을 뽑는다. 을지면옥은 돼지고기 편육이 기가 막히다.
우래옥은 배 채친 것, 백김치 등 고명이 맛있다. 고기국물이 진하고 깊다. 100% 메밀면을 사용한 순면(純麵)이 일품이다. 백김치와 무채의 하얀 고명이 특이하다. 우래옥 주방장 출신이 운영하는 방이동 봉피양(‘본래 평양’ ‘평양본가’란 뜻의 평양사투리, 02-415-5527)의 순면은 품격이 있다.
남포면옥이나 마포염리동의 을밀대(02-717-1922)도 이름난 집이다. 남포면옥은 시원한 동치미에, 면발이 쫄깃하진 않지만 부드럽고 메밀 맛이 많이 난다. 봉평 메밀만 쓰며 메밀 90%에 감자전분 10%를 고집한다. 쫄깃한 수육이 빼어나다. 을밀대는 젊은 직장인과 여성들이 많이 찾는다. 노릇노릇 녹두빈대떡이 맛있다. 육수 맛이 약간 자극적이고, 면발이 다른 곳보다 조금 두툼하면서도 쫄깃하다. 젊은 층 취향이다. 확실히 어르신들이 4대천왕집보다 적다.
황해도식 양평 옥천냉면(031-772-9693)도 빼놓을 수 없다. 면발이 꼬들꼬들 보통의 2배쯤 굵다. 돼지고기 완자도 안 먹고 나오면 서운하다. 피서철 강원도 여행자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평양냉면, 제대로 먹기
평양냉면은 먹는 법이 따로 있다. 각자 스스로 간을 맞춰 먹어야 한다. 식초와 겨자를 치기에 앞서 간장으로 간부터 맞춰야 한다. 냉면이 나오면 우선 국물 맛부터 봐야 한다. 역시 육수 맛이 좋아야 맛도 좋다. 육수 맛을 본 뒤엔 면발의 질감을 느껴봐야 한다. 처음엔 혀와 입으로, 그 다음엔 가슴으로, 마지막엔 온 몸으로 떨어봐야 한다. 면발은 뱃속으로 사라져도, 그 질감은 혀끝 맛봉오리에 깊이 새겨진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는가.
보통 한국 사람들은 냉면이 나오기 전에 수육이나 녹두빈대떡 등을 안주 삼아 반주를 한다. ‘선주후면(先酒後麵)’이다. 약간 달아오른 몸에 찬 냉면국물을 쭈욱 들이 붓는다. 앗, 차가워라! 화들짝 몸뚱이가 진저리를 친다.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어찔어찔 감미롭다. 이 슴슴하고 얼얼하고 그리운 맛! 돌아서면 혀끝에 뱅뱅 맴도는 밍밍한 맛!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맛은 무엇인가! 그렇다. 둥둥! 위 덩더둥셩 아으 다롱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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