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 중 일어나는 신경전 중 그래도 가장 빼어난 종목은 흉내바둑일 것이다.
이름하여 상대가 둔 바둑을 똑같이 따라두는 것인데,아마추어들 사이에서도 간혹 심심찮게 두어보는 것이다.
프로들 중 흉내바둑을 구사한 이는 실제로 공식대국에서는 많지 않다.따라두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실제로 공식시합에서 그런 흉내바둑을 두었을 경우 쏟아질 비난을 감안하면 실제로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바둑계에서 흉내바둑으로 성가를 드높인 기사로는 한국의 서봉수가 대표적이요,일본에서는 살아있는 기성 우칭위엔,그리고 후지사와 호사이(우리가 아는 후지사와 슈코와는 다르다)가 유명하다.특히 후지사와 호사이는 그를 상징하는 수식어로 '흉내바둑의 대가'로 쓰일 정도다.
흉내바둑은 구사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다.흉내바둑을 구사하는 쪽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지만(?) 1인자에 도전하는 2인자가 쓰는 수법이다.
그 지략이 승부의 한 전술로는 타당하지만 어디까지나 무임승차한 면이 없지 않아 약간 비신사적이기도 하다.
흉내바둑도 두 가지 부류가 있다.역사에 남는 흉내바둑이 있는가 하면 그보다는 약하지만 빈도는 훨씬 많은 '기세싸움'으로 인한 흉내바둑이 있다.전자는 철저한 신경전이 가미된 것이고 후자는 피차 묵인한 신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얘기부터 하자.'살아있는 기성' 우칭위엔이 일본으로 날아가 소위 신포석이라는 바둑계의 대개혁의 물꼬를 틀 즈음이다.우칭위엔은 중국에서 건너오자마자 일본기원은 그에게 3단을 윤허했을 정도로 그 기재가 출중했는데,당시 일본에선 그와 신포석 혁명을 일으킬 동반자 기다니 미노루라는 걸출한 라이벌이 있었다.
말이 라이벌이지 우칭위엔에겐 넘을 수 없는 큰 산으로 비칠 시점이었다.훗날 일본 바둑계는 이 기다니의 제자들로 인해 좌지우지된다.조치훈 고바야시 오다케 이시다 다케미야 가토 등 쟁쟁한 일본바둑계의 거성이 전부 기다니의 제자들이다.
일본의 신문은 기다니와 우칭위엔간의 10번기를 기획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