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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과 국가 지도자

바둑이야기

by kkabiii 2017. 10. 1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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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철 회고록 발췌)

#1 경무대 대국
1955년 2월 4일 경무대(현 청와대)에 나(조남철)와 김봉선 초단이 초대받았다. 한국기원 초대 이사장이자 집권 자유당 중진이었던 장경근씨가 주선했다. 백발에 보일락말락 미소를 띠며 팔자걸음으로 다가온 이승만 대통령은 ”아, 자네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어디 한 판 구경 좀 시켜주게“라며 자리를 잡았다.

1시간 여 만에 바둑을 끝낸 순간, 이 대통령이 물었다.“그런데 자네들 왜 하필 ‘왜놈바둑‘을 두는 거지?”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침착하게 설명을 드렸다. 대통령은 ”응. 그렇다면 어디 우리 순장바둑을 한 번 두어보게“했다.
대국을 관전하면서 대통령은 ”나 같으면 이렇게 두겠다. 그게 바로 도남에 의재북이거든“이라며 흥겨워했다. 꼬박 3시간이 넘어가자 노(老) 대통령의 건강이 걱정된 프란체스카 여사가 말리려 했으나, 이 대통령이 워낙 좋아하는 모습을 확인하곤 조용히 사라졌다.

바둑이 끝나자 이 대통령은 “아. 재미있게 구경했네. 자네들 중국으로 원정을 간다고?”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이 대통령은 “그래, 잘 싸워 이기고들 오시오”하며 비로소 안채로 사라져 갔다.
이런 곡절을 거쳐 우리 대표 팀은 자유중국(현 대만)과의 제1회 한-중 친선바둑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6.25 동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당시엔 대통령의 서명이 있어야 달러를 지급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2 이승만 9단
이박사는 노구(老軀)인데다가 복잡한 정무에 시달리는 몸이었지만, 잠시의 시간만 있으면 비서 혹은 경호원 가운데 바둑 둘 줄 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싸움을 붙여놓고 관전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는 낙으로 삼았었다.
관전하다가 때로는 훈수도 하고, 때로는 참다못해 놓은 돌을 도로 집어 “이 사람아, 이렇게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면서 직접 갖다 놓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언젠가 내게 “중국 망명 시절 지루한 나날을 보내기 무료해 동지들이 두는 바둑 구경을 하곤 했다”는 말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국가 원수(元首)가 애기가란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바둑계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자유당 중진들 중에는 자칭 국수(國手)들이 많았고, 이분들은 이름도 애교스럽게 허세구락부(虛勢俱樂部)란 모임까지 만들어 수시로 어울릴 정도로 억세게 바둑을 두었다.
1960년 3월 27일 이 대통령의 생신을 맞아 사단법인 한국기원 관계자들이 선물을 마련하기로 했다. ‘돈 안 들고 좋은 선물’이 있었다. 바로 ‘명예 단’ 윤허장이었다. 앞서 초대 한국기원 이사장 장경근씨에게 5단을 주었다는 점, 어차피 아마추어 단은 반드시 바둑실력으로 주는 게 아니란 점 등을 참작해 9단 증을 준비했다.

한국기원 2대 이사장 최하영(당시 심계원장)씨가 윤허장을 가지고 올라갔다. “바둑하는 사람들이 각하의 생신을 축하해 보내온 것”이라며 윤허장이 든 두루마기 통을 대통령께 건넸다.
<允許狀/九段 李承晩/ 貴下는 棋力이 入神의 域에 달하였으므로 이 段位를 允許함…> 이 대통령은 미소를 띠면서 “이 사람아, 내가 9단밖에 안 되나?”라고 우스개를 던졌다. 바둑을 사랑하는 노(老) 대통령 덕에 바둑계도 비약하기 시작했다.

(녜웨이핑(聶衛平) 회고록 발췌)

#1 천이(陳毅)아저씨와의 만남
내가 어렸던 시절 부모님들은 평소 나와 내 동생 계파의 교육에 퍽 엄격하셨다. 특히 학교 성적에 대해서는 가차 없었다. 내가 바둑에 몰입하면서 학교 수업까지 빼먹는 일이 생기자 바둑돌을 일체 만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부모님들도 그 엄명을 실제 실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내게 큰 관심을 가지고 아껴주는 특별한 바둑 친구가 한 분 계셨기 때문이었다. 바로 천이(陳毅) 원수(元首)님이었다.

내가 陳원수의 바둑 친구가 된 것은 1962년 여름, 내 나이 10살 때였다. 바둑 영재로 제법 알려져 있던 나는 동생 계파와 함께 초대받았다. 최고 권력자는 나와 판을 벌이는 한편 자리를 함께 했던 국가체육위원회 고위 인사, 바둑계 고수들과 바둑 발전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세한 기억은 불분명하지만, 당시 陳원수가 내게 “열심히 바둑을 배워 장래 일본 9단을 꺾어 달라”고 했던 말은 인상 깊게 남아있다. 아마도 그 때부터 내 마음 속엔 ‘일본 9단 타도’란 목표가 심어졌고, 바둑이 단순한 놀이만은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이해한 것 같다.

#2 元首의 손목을 잡아채다
陳원수는 그 후 시간만 나면 나를 데리고 가 바둑을 두었다. 陳원수 앞에서 나는 처음엔 좀 어려워했으나, 그가 항상 빙그레 웃음짓는 것을 보곤 점점 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한번은 대국 중 그가 착점 후 잘못을 깨닫고 손을 뻗어 돌을 도로 집어내려고 했다. 陳원수는 그러나 즉각 내게 손목을 잡히게 될 줄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내 말도 안 되는 행동에 陳원수는 가가대소 했고 주위사람들은 쓴 웃음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후 張福田 雷溥華 등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 그들의 정성스런 지도를 받았고 크게 성장해갔다. 그 이면엔 陳원수의 극진한 후원이 있었다. 그리고 첫 만남 때 그가 당부했던 대로 훗날 나는 정말로 일본 9단들과 겨뤄 그들을 물리치는 날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바둑을 국가체육국 산하에 넣어 스포츠로 전환한 것, 1960년 첫 중-일 간 바둑 교류를 성사시킨 것도 그의 업적이다. 陳원수는 외국에 사절단을 보낼 때 반드시 바둑 고수를 포함시켰다.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중국 바둑의 융성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2009년 가을 중국發 뉴스들

올해 10월 16일. 중국 정부의 최정상인 후진타오(胡錦濤)가 산동성 지난(濟南)서 열린 전국체전 개막식장에 나타났다. 그는 여러 명의 중국 체육관계자들을 만나 환담하고 격려했다.
그 중엔 어느 새 바둑계의 원로로 대접받고 있는 녜웨이핑도 포함됐다. 후 주석은 녜웨이핑에게“최근 2년 간 중국바둑의 발전 기세가 아주 좋다. 몇 년 전과 비교해 매우 강해졌다”고 칭찬했다.

후 주석과 대화를 나눈 녜웨이핑에 따르면 주석과은 중국바둑 현황에 대해 매우 자세하고 광범위하게 알고 있었다. 바둑에 관한 주석의 질문도 깊이가 있고 전문적이었다.
후 주석은 녜웨이핑에게 중국 바둑사업의 전체적인 발전 속도에 크게 만족한다며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 좋은 성적을 내달라”고 당부했다. 녜웨이핑은 후 주석이 접견해야 할 사람이 아주 많았음에도 자신과 바둑에 대해 오랜 시간동안 얘기를 한 데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후진타오는 그 전국체전 개막식 자리에서 중국 축구계의 전설로 불리는 룽즈싱(用志行)도 만났다. 룽즈싱은 축구 기량도 뛰어날 뿐 아니라 페어플레이와 성실한 훈련, 절제된 생활로 존경받아온 인물이다.
후진타오는 그 자리에서 룽즈싱에게 “중국 축구는 당신의 품격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승부조작, 각종 저질 매너, 나이 속이기 등의 추문 속에 ‘쓰레기 축구’란 말까지 듣고 있는 중국 축구계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 것이다.
이보다 나흘 전 시진핑(習近平) 부주석도 축구계를 향해“중국은 일류 축구팬과 세계적 축구시장을 갖고 있지만 경기 수준은 매우 낮다.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란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11월 중순엔 중국을 순방 중이던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에게 바둑판과 바둑알 및 통을 선물했다는 뉴스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상대적으로 바둑 불모지인 미국의 대통령이 하필 바둑 용품들을 선물로 골랐는지 아리송하다.
이 경우를 미국지도자의 바둑 사랑으로 강변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최소한 바둑에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튼 앞으로 미-중 양국 젊은이들이 함께 어울릴 때 바둑을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바둑의 세계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둑의 ‘바’자도 모를 미국 대통령의 바둑용품 선택은 바둑 최선진국을 표방하는 우리로선 부럽기만 한 일이다.

국가 통치자의 힘과 영향력

1970년대 본격 중-일 슈퍼대항전이 시작됐을 때, 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덩샤오핑(鄧小平) 후야오방(胡耀邦) 등 중국 통치자들은 TV를 시청하며 열렬한 성원을 보내곤 했다. 부득이한 일로 생방송을 놓칠 경우엔 비서에게 실황을 녹화하도록 한 후 나중에라도 반드시 챙겨 보았을 정도로 그들은 바둑을 좋아했다.
1966년부터 10년 간 계속된 문화대혁명은 중국 바둑의 입장에서도 캄캄한 암흑기였다. 그 장애물을 뛰어넘어 중국이 오늘날 세계 최강의 지위에 오른 데는 역대 중국 지도자들의 바둑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애정, 성원이 큰 몫을 했다.

천이(陳毅)가 생전에 남긴 말 중 섬뜩한 한 마디가 있다. “바둑이 흥하면 국운도 흥한다.”실제로 그랬다. 문화대혁명 발발로 천이가 실각을 맞았고 중국 대륙이 혼란과 질곡의 세상으로 변했던 시절, 중국바둑도 완전한 공백기를 피해가지 못 했다.
요즘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중국은 바둑에서도 승승장구를 거듭 중이다. 천이의 예언은 곱씹어 볼수록 전율을 느끼게 만든다. 역대 중국 지도자들은 바둑과 관련해서 뭔가 공통적인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같다.
중국 지도자들의 잇단 관심 표명을 보고 있노라면 중국 축구의 앞날도 심상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베이징 소재 중국기원 건물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1층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천이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국무원 부총리, 상하이 시장에다 원수(元首)까지 지낸 거물의 동상이 왜 중국기원 입구에 세워졌을까. 당대 권력자였던 데다 외교관이자 시인까지 겸했던 멋쟁이라서? 물론 아닐 것이다.

한국 역대 정상 중 바둑을 즐기고 사랑한 사람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 선에서 머물렀다. 불모지였던 한국 바둑은 그 시절부터 차근차근 골격을 갖춰갈 수 있었다. 그 이후엔 바둑을 둘 줄 안다는 대통령들은 몇 명 있었지만 바둑계에 별 도움은 주지 않았다. 어쩌다 세계대회 입상자들에게 훈장을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바둑으로만 좁혀보면 한국을 ‘지도자 복’이 많았던 나라로 분류하긴 힘들 것 같다. 최소한 중국에 비하면 그걸 부인하기 힘들다. 앞으로 우리 바둑계 앞엔 어떤 지도자들이 강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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