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병세대>
학병세대란 일제강점기 지식인으로 학병(學兵)에 징집되어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궁지에 몰리자 1943년부터 ‘조선인학도육군특별지원제도’라는 명목으로 조선 학생들을 동원했다. 윤치호는 이 지원제를 일본이 조선인을 동등한 국민으로 인정한 조치라며 적극 지지하였다.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주역이었던 그는 미국 밴더빌트대학 유학중 백인인종주의에 상처받고 사회진화론자로 전환한다. 그는 이윽고 1890년 5월 18일 일기를 통해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를 필두로, 이광수, 김활란, 최남선, 모윤숙 등 조선의 지도자들은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황군에 복무하는 것은 조선민족의 영예’라며 출정을 권유했다. 1943년 최남선이 동경제국대학 대강당에서 조선 학생을 대상으로 학병을 권유하는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법학부 학생 한명이 “일본군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당신들 자식부터 내보내라”고 일갈하였다. 당시 최남선의 아들 최한검이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학생이었는데, 학병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을 곤혹스럽게 한 이 학생의 이름은 신상초다.
[그림1] 출정하는 학병. 송광사 출신 스님 5명이 학병 출정에 앞서 마을주민과 유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출정식을 갖고 있다. ⓒ네이버 블로그-Retaliation
학병에 대한 학생들의 입장은 두 가지였다. 학병을 거부하거나, 징집에 응하거나. 학병거부의 대표적 인물은 빨치산 지도자 하준수(일명 남도부)다. 경남 함양의 부잣집 아들인 하준수는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 재학중 학병으로 징집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해 지리산에 숨어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공산당 간부 이현상을 만나 보광당을 결성해 해방 때까지 항일활동을 벌였다. 국내에서는 보성전문대학의 이철승과 경성제국대학의 이혁기 등이 주동하여 한달동안 학병거부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철승과 이혁기도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결국 강제 징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직후 이철승은 반탁학생총연맹을 결성해 우익의 행동대장이 되고, 이혁기는 조선국군준비대를 결성해 좌익의 행동대장이 된다. 하준수는 잠시 이승만 박사의 경호대장을 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1943년부터 해방때까지 약 4,300명의 조선 학생들이 초보적인 군사훈련만 받은 채 중국과 동남아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총알받이였다. 대다수 학생들은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학병에 응했다. 이들 중 일부는 생전에 수기를 남겼다. 학병세대의 수기 중 걸작으로는 장준하의『돌베개』, 김준엽의『장정』, 박순동의『모멸의 시대』, 신상초의『탈출』을 들 수 있다.
<탈출>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할아버지는 장로,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는 일본신학대학을 다니다 1944년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강소성 서주에 배치되었다. 문익환 목사가 같은 대학에 다녔다. 김준엽은 1920년 평북 강계 출신이다. 1944년 일본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에 재학중 학병에 징집되어 장준하와 같은 부대에 배치되었다. 박순동은 1920년 전남 순천 출신이다. 장준하가 독실한 기독교집안 출신이었음에 비해 박순동의 집안은 독실한 불교집안이었다. 매형이 선암사 승려였다. 그는 15살때 전남 승주의 선암사에 들어가 승려수업을 받았다.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마자와불교대학에 입학했다. 1944년 1월 학병에 징집되어 동남아시아 버마전선에 투입되었다. 신상초는 1922년 평북 정주 출신으로 김준엽과 신의주고보 동창이다. 그는 1944년 동경제국대학 법과에 재학중 징집되어 중국 산서성에 배치되었다. 앞서 최남선에게 일갈한 바로 그 학생이다.
[그림2] 일본신학대학 유학시절의 장준하(오른쪽). 징집 당시부터 장준하는 임시정부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아내에게 탈출이 성공하면 편지에 성경구절을 쓸 것이라고 알려준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이 네 명의 공통점은 탈출이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학병들이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일본군대를 탈출했는지에 대해 신상초는 자신의 수기에 이렇게 남겼다.
나는 일본이 앞으로 몇 해 동안이나 전쟁을 지속할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분석할 때 단순히 일신의 안위만을 문제로 삼는다면 일본군대에 남아서 적당히 복무하는 것이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탈출을 자행하는 것보다 몇 갑절 안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군에 남아서 하사관이 되고 하급장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것이요, 민족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가 일본군국의 병참기지인 한국에서 일본군적에 강제 편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전선에 나가서까지 그 앞잡이 노릇을 할 필요는 없다.(신상초,『탈출』, 녹문각, 1966, 66쪽)
김준엽은 1944년 3월 중국 강소성 서주의 일본군부대를 탈출해 중국 국민당 유격대에 들어간다. 그는 서주에 주둔한 쓰까다부대의 1호 조선인 탈영병이었다. 3개월 뒤 같은 부대에서 장준하가 탈출하였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국민당유격대를 떠나 1945년 2월 중경에 도착해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박순동은 1945년 3월 미얀마전선에서 부대를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했다. 그는 인도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보내졌다. 신상초도 1944년 부대에서 탈출해 중국공산당 신사군에 들어간다. 신상초는 중국 배치 당시 김준엽과 같은 기차 같은 좌석에 앉아 탈출계획을 모의했었다. 그는 신사군에서 조선의용군으로 보내졌다. 같이 조선의용군에 있었던 심영순에 따르면 신상초는 이때 조선의용군에 가지않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과거 조선의용대시절, 김원봉을 따라 중경으로 간 대원들은 광복군이 되었고, 박효삼을 따라 화북으로 간 대원들은 조선의용군이 되었다. 해방후 광복군 출신들은 국군이 되었고,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인민군이 되었다. 학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는 종종 우연이라는 매개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좌우한다.
[그림3]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이 된 장준하와 김준엽. 1945년 8월 해방 직전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 카메라를 응시하는 세 학병의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다. 장준하(오른쪽), 김준엽(가운데), 노능서(왼쪽). ⓒ장준하기념사업회
가장 극적인 인물은 박순동이다. 그는 영국군에 투항직후 포로로 취급되었다. 이윽고 연합군 포로신분으로 미국 전략첩보국(OSS) 첩보원이 되었다. 그는 LA 앞바다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섬에서 첩보훈련을 받고 한반도침투작전(냅코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당시 냅코프로젝트에는 재미한인들도 참여했는데, 50살이었던 유일한(유한양행 설립자)도 OSS에 자원해 냅코프로젝트 1조장을 맡았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민족주의자 김범우는 박순동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조정래는 외삼촌 박순동의 일제강점기 삶을 통해 좌우에서 고뇌하는 중간파 김범우를 창조했다. 또한 박순동은 『여명의 눈동자』에 나오는 미군 정보장교 장하림의 모델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 중경에 있던 장준하와 김준엽도 중국 주재 OSS에 편입되어 서안에서 침투훈련을 받고 한반도침투작전(이글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신상초는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과 조선의용군 제5분교 항일군정대학에서 사상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신상초는 이곳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주제로 와세다대학 철학과 출신인 최일운과 각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일대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림4] 중국 태항산지구에서 조선의용군이 군중선전대회를 벌이는 모습. 연단에 서 있는 사람은 조선의용군 사령관 김무정이다. 그는 해방직후 입북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2군단장으로 참전했다가 전쟁중 병사했다. ⓒ길림신문
<모멸의 시대>
8․15는 학병세대에게 전환의 시대이자 모멸의 시대였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미국 전략첩보국이 추진하던 한반도침투작전은 폐기되었다. 장준하와 김준엽, 박순동은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을 들으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다행히 장준하와 김준엽은 미군 장교신분을 획득했다. 장준하는 8월 18일 광복군 국내정진군의 선발대로 여의도비행장에 왔다가, 12월 김구 선생의 비서로 정식 환국한다. 그리고, 1946년부터 광복군 총사령관 이범석이 창설한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을 맡았다. 그러나 결국 신학공부를 위해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였다.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장차 투쟁의 칼이 될 『사상계』를 창간하였다. 김준엽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광복군 총사령관인 이청천의 부관이었기 때문에 중경에 남았다. 그리고 이청천이 귀국하자 그는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김준엽은 1946년 남경에 있는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한다. 1948년부터는 국립중앙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이곳에서 동양사를 전공했다.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평정하자 비로소 고국에 돌아왔다. 민족주의자다운 선택이었다.
[그림5] 사상계시절의 장준하(왼쪽 두 번째)와 김준엽(왼쪽). 광복군이었던 두 사람은 각각 언론인과 학자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탈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장준하기념사업회
그러나, 박순동은 해방직후 일본군과 함께 하와이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옷에는 전쟁포로(P.M) 마크가 선명히 새겨졌고, 가슴에도 낙인되었다. 강대국은 식민지 청년을 데려다 그렇게 쓰고 버렸다. 신상초는 중국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이동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그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에 편입되어 만주로 이동해 1945년 12월까지 연변에서 마적을 토벌했다. 당시 5지대장은 이익성(후에 인민군 7사단장), 정치위원은 박일우(후에 북한 내무상)였다. 그러나 해방된 타국에서 수구초심은 각별했다. 신상초는 다시 탈출을 결심한다. 그는 동료 학병들과 연변에 살던 문동환(문익환의 동생) 목사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한다. 1946년 1월 20일 문동환이 건네준 한복을 걸치고 두만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곧 내무서에 체포된다. 탈출한 조선의용군들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후 교화소로 보내져 17개월간 강제노동에 종사했다. 1947년 풀려난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1949년 1월에 월남한다.
<김준엽과 박순동>
해방이후 네 명의 학병은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살게 된다. 김준엽은 1949년 중국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학계에 투신한다. 고려대 문리대 조교를 시작으로 평생 고려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중국사와 공산주의운동사를 연구하며 제자를 키웠다. 동시에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편집위원과 주간을 역임하며 활발한 집필활동도 벌인다. 장준하가 반독재투쟁을 벌이던 그 시절, 김준엽은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학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의 이같은 행로에는 일본 유학시절 접한 게이오대학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삶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유신 이후 관료로 초빙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게이오대학에서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김준엽은 1980년대 초에는 고려대 총장까지 오른다. 그러나 1982년 전두환 정권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해 여름 고려대에서 농성중이던 학생들을 경찰이 체포하려하자 전두환 대통령을 찾아가 담판을 벌여 학생들을 무사히 귀가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결국 김준엽은 1985년 강제로 총장에서 사임되었다. 그는 생전에 독재정권으로부터 세 번의 정치제의를 받았다. 5․16쿠데타 직후에는 공화당 사무총장, 1974년에는 통일원 장관, 1988년에는 국무총리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사림같은 지조다. 김준엽은 2011년 6월 7일 오랜 ‘장정’을 끝마쳤다.
[그림6] 1985년 3월 총장직에서 강제로 사임된 이후 고별사를 하는 김준엽. ⓒ신동아
박순동은 1945년 12월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다. 1946년 1월에 고국에 돌아와 고향 순천에 정착한다. 이후 그는 네 명의 학병 중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귀국직후 1년동안 미군정청 순천지청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1947년부터 순천제지회사 업무과장으로 근무하는 동시에, 순천․벌교․목포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살았다. 극단의 시절이던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당시 박순동은 좌우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해방의 열정이 포로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현실을 목격한 후 그는 이데올로기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박순동은 1965년 신동아가 주최한 문학상에 응모해 논픽션부문 최우수상을 받는다. 냅코프로젝트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로, 제목은 『모멸의 시대』였다. 종전과 함께 다시 조국 없는 포로가 되었을 때, 박순동은 “분노와 절망을 넘어서 한없는 모멸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 글로 우리나라 최초의 논픽션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모멸의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1969년 50세의 나이로 절명한다.
[그림7] 박순동의 논픽션소설 『모멸의 시대』표지. 그는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 의사를 다룬 『전명운전』과, 1920년대 항일 소작쟁의사건을 다룬 『암태도 소작쟁의』 등 세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모멸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디며 백성의 힘을 묵묵히 원고지에 기록하였다.
<장준하와 신상초>
장준하의 귀국 후 삶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사상계』를 무기로 여생을 반독재민주화투쟁에 바쳤다. 그는 1967년 6대 대선에서 공개적으로 윤보선을 지지했는데,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며 박정희 후보를 비판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광복군 출신 장준하는 일본군 출신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에게 반독재투쟁은 또다른 항일투쟁이었다. 그는 정치로 눈을 돌린다. 장준하는 1967년 총선에서 신민당의 공천을 받고 동대문에서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신민당 소장파 김영삼 의원과 함께 국방위원회에 소속되어 월남파병문제를 줄기차게 비판했다. 1970년 윤보선이 신민당을 탈당할 때 같이 나와 국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정작 윤보선은 김구 비서 출신이며 이범석의 족청계 인물이었던 장준하를 신뢰하지 않았다. 유신의 겨울이 시작되자 그는 반유신의 선봉에 서서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인다. 긴 겨울의 서막에서 백기완과 함께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다시 해방된 조국에 갇힌다. 장준하는 징역 15년을 받고 수감중 지병으로 10개월만에 출감한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을 등산중 머리에 둔기를 맞고 암살되었다. 그는 지금도 무덤 속에서 돌베개를 베고 있다.
[그림8] 1973년 12월 24일 유신헌법을 정면으로 거부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선언문을 낭독하는 장준하. 모두가 얼어붙은 그 겨울의 시대, 장준하는 늘 눈보라의 맨 앞에 있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신상초는 1949년 월남이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3월부터 서울중학교 교사로 근무를 시작한다. 그리고 1975년까지 한양대․경희대에서 교수로 근무한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그가 탈출했던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인민군 12사단에 편입되어 참전했다. 탈출하지 않았다면 그도 인민군이 되었을 것이다. 신상초는 1954년부터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시작으로 1974년까지 언론인으로도 활동한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정치에 뛰어든다. 그는 1961년 민주당 소속으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그의 정치인생은 시작도 못하고 끝난다. 그는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를 통해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등 반정부 지식인으로 필명을 날린다. 그는 강사로도 활약했는데, 서울대학교 연설에서 “한강의 기적이 정인숙 사건이더냐, 조국 근대화가 와우아파트더냐”며 박정희정권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의 나이 49살 때 일이다. 그러나 신상초는 1972년 유신선포 이후 탈출을 포기한다. 그는 유신정우회에 가담해 9대․10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다.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자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해 민정당 소속으로 11대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영원한 자유를 꿈꾸던 학병 신상초는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6월항쟁이 신군부의 전리품으로 끝난 1989년 2월 26일, 그는 비로소 자유를 찾는다.
[그림9] 언론인 시절의 신상초. 일본군에서 조선의용군, 만주에서 북한, 북한에서 남한으로, 영원한 탈출을 꿈꾸었던 학병 신상초는 결국 탈출을 포기하고 만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원한 탈출>
신상초와 같은 일본군부대에는 와세다대학 동양사학과를 다니다 온 엄영식이 있었다. 엄영식은 평북 정주출신으로 신상초의 죽마고우다. 둘의 인연은 남다르다. 그는 신상초와 함께 같은 날 일본군을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편입된다. 1946년 초 다시 신상초와 함께 조선의용군을 탈출해 이북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엄영식도 고향에서 내무서에 체포되었으나, 몇 개월만에 풀려나 1947년 월남에 성공한다. 그후 학계에 투신해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중국사를 연구했다.
[그림10] 엄영식의 학병수기, 『탈출 – 죽어서야 찾은 자유』 ⓒDaum-책
엄영식과 신상초는 둘 다 수기를 출판했는데, 공교롭게 제목이 같다. 제목은 『탈출』. 엄영식의 부제는 ‘죽어서야 찾은 자유’, 신상초의 부제는 ‘어느 자유주의자의 수기’다. 둘의 공통분모인 ‘자유’와 ‘탈출’은 학병세대에게 삶의 전부였다. 이들은 식민지시기에는 일제지배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 해방된 조국에서는 사회주의와 독재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 탈출했다. 장준하가 반독재투쟁을 통해 자유를 향해 탈출했다면, 김준엽과 엄영식은 학문을 통해 탈출했다. 박순동은 우직한 백성의 삶을 통해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했고, 신상초는 마침내 탈출을 포기하고 말았다. 탈출은 누구에게나 생명을 거는 일이다. 오늘날, 민생고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탈출이 일제와 독재로부터 탈출보다 쉽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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