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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의 원조, 명동백작 성시백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2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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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5월 25일 오전 11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전쟁이 발발하기 딱 한 달 전이다. 기자회견에는 서울지검 이태희 검사장, 오제도 부장검사, 육군정보국장 장도영 대령, 치안국장 김태선이 참석했다. 당시 정부의 대공수사 당국자가 총출동한 것이다. 이날 합동수사대는 이른바 “북조선로동당 남반부 정치위원회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날 발표된 수사결과를 보면, 검거인원만 무려 112명이었다. 검거된 이들의 직업도 상인, 공무원, 교원, 학생, 회사원, 직공, 의사, 외국공관원 등으로 다양했다. 공작비는 미화로 39,000달러에 달했다. 1949년 7월 달러환율이 1대 900이었으니 원화로는 약 3,500만원이다. 1950년 쌀 한가마니(80kg) 가격이 400원이었는데, 지금은 200,000원이니 500배. 대충 따져도 공작금이 현재가치로 175억쯤 된다.

   간첩에 대한 정보를 처음 입수한 곳은 서울시경이었다. 서울시경은 1949년 5월부터 북에서 남파된 간첩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내사를 벌였다. 그리고 1950년 2월 10일 비밀 아지트를 습격해 간첩 부책 김명용을 체포한다. 2월 12일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군검경 수뇌부 비밀연석회의가 개최된다. 이날 기관 간에 역할분담과 수사방침을 확정한다. 합동수사대 총지휘자는 서울지검 오제도 부장검사가 맡았다. 그는 평남 안주출신의 월남민으로 김수임 간첩사건, 국회프락치사건 등 공안사건을 전담해온 반공검사다. 그와 함께 선우종원, 정희택, 이주영 검사가 지휘검사를 맡았다. 치안국 사찰과장 장영복, 서울시경 사찰과장 이하성이 보좌관을 맡았다. 그리고 서울시경 사찰과와 국군 정보장교들로 수사반을 편성해 검거에 돌입했다. 드디어 2월 15일 새벽 3시, 수사반은 서울시 종로구 효제동에 있는 아지트를 급습해 간첩단 총책을 검거한다. 그가 바로 명동백작 성시백이다.


[사진1] 1950년 5월 26일, 언론에 발표된 ‘성시백사건’  ‘매국도당을 근멸, 북로남반정치위원 총검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공작비만 미화 38,000불. 순금, 무전기 등 압수품 다수. 공무원도 끼어 100여 명 검거’  ⓒ동아일보, 1950.5.26

<중국공산당 첩보원>

   성시백(成始伯)의 약력은 1950년 5월 26일, 수사당국의 보도자료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다.

‘성시백(53세). 중동학교 고등과 졸업. 22세때 상해로 건너가 중국공산당 가입. 30년 동안 공산주의운동. 고향 황해도 평산.’

   그 후 지금까지 성시백의 약력에 대해서는 고향이 평남이라는 설, 본명이 ‘정향명’이라는 설 등등 기본적인 인적사항조차 불분명하다. 지금까지 출판된 책과 증언을 통해 알려진 성시백의 약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시백은 1905년 4월 5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생년월일은 북한에 있는 그의 묘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해주에서 소학교를 마친 후 서울에 올라와 중동학교 고등과에 입학한다. 그는 중동학교 재학 중 3ㆍ1운동에 참가하였고, 1925∼1926년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일찍부터 사회주의자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책임비서 박헌영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8년경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에서 학교를 다니다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이때부터 그는 첩보분야에 종사하게 된다.

   먼저, 그는 국민당 통치지구로 들어가 지하공작을 펼친다. 초기에 주로 활동한 지역은 서안이었다. 당시 국공합장문제로 주은래가 서안에 와 있어서 주은래와 긴밀한 친분을 맺게 된다. 1935년경에는 중경으로 가서 팔로군 중경판사처를 근거지로 삼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대로 지하공작을 전개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였다. 성시백은 김홍일, 이범석, 엄항섭, 장건상과 친밀했고, 이들을 통해 김구를 후원했다. 해방된 뒤에도 그는 중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1946년 초 부산으로 입국한다. 성시백은 서울에 올라와 잠시 정국을 파악한 후 2월에 평양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성시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에서 김일성 직계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가 김일성의 직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입북 당시 주은래의 신임장을 갖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3월부터 남북을 오가며 남한의 조선공산당에 대한 연락업무, 좌우합작과 좌익3당 합당사업을 맡았다.


[사진2]  1945년 10월 14일 평양 모란봉운동장에서 개최된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시민대회’  당시의 김일성. 왼쪽은 강미하일 소좌, 오른쪽은 소련군 제25군 정보담당과장 메끌레르 중좌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후원을 배경으로, 해방직후부터 점차 정치적 헤게모니를 확대해갔다. 해방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은 서울에서 설치되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북한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한다. 이후 북조선분국은 북조선공산당으로 전환하고, 조선신민당과 함당해 북조선로동당을 창당한다. 남한에서는 좌익3당이 합당해 남조선로동당이 형성된다. 그러나 미군정에서 남로당을 불법화함에 따라 한반도에서 좌익의 주도권은 북로당으로 넘어간다.  ⓒ동아일보, 2004.9.12.

<성시백선>
 

   성시백은 1947년 5월경 김일성으로부터 ‘대남특수정치공작지령’을 받고 서울에 정착한다. 그는 서울시 서소문동에 아지트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지하공작에 돌입하였다. 그의 임무는 세 가지였다. 남로당 창당과정에서 떨어져나간 좌익들을 수습하는 일, 임시정부계열과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사업, 미군정청․경찰․군대의 정보를 탐지하는 일이었다. 성시백은 우익정당ㆍ단체, 중간파정당․단체, 미군정청․경찰․첩보부대에까지 손을 뻗친다. 그는 특유의 치밀한 지하공작실력과 일제강점기 인적 관계를 활용해 광범위한 인적 연계망을 구축했다. 이른바 ‘성시백선’이다. 성시백선의 스펙트럼은 실로 끝이 없다. 김구의 개인비서 안우생, 김규식의 비서 권태양, 민족자주연맹 간부 박건웅, 조소앙의 비서 김흥권, 이범석 계열의 정국은, 여운형이 만든 근로인민당의 최백근, 홍명희가 만든 민주독립당의 강병찬 등이 성시백선으로 알려져 있다. 성시백이 구축한 조직은 ‘북조선로동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직을 구축한 적이 없다. 성시백선은 박헌영의 ‘남로당’과는 별도로 북조선로동당에 직속된 첩보망이었다. 남로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모든 활동은 개별접촉을 통해 진행되었고, 독자적인 조직도 만들지 않았다. 모든 선은 횡적으로 연결되었고, 전체 규모는 오직 총책인 성시백만 알고 있었다.


[사진 3] 해방직후 귀국한 안우생  앞줄 가운데가 김구 선생, 뒷줄 오른쪽 세 번째가 홍명희다. 안우생은 성시백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 안공근의 장남이다. 안우생은 상해시절부터 김구 선생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김구 선생의 대외담당비서를 맡았다. 대외담당비서를 맡은 것은, 그가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불어, 에스페란토어를 구사하는 어학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안우생은 김구 선생에게 남북합작의 필요성을 역설해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북한을 방문했으며, 1949년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자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얼마 머물다 북한으로 들어갔다. 1970년대 김일성의 지시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는 유해발굴단장을 맡기도 했다. 1991년 2월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안우생은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안기철은 제주4․3사건의 유격대장 김달삼의 딸과 결혼했다.  ⓒ민족21

   성시백의 공작은 좌우를 넘나들었다. 1947년 5월에는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결성하는데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8년이 밝아오자 성시백은 안우생과 권태양을 통해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남북연석회의 참석자들의 입북을 도왔다. 1949년 1월부터는 국회에도 침투했다. 그는 첩보원 강병찬을 통해 국회의원 5~6명을 동조자로 포섭했다. 1949년 6월 발표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된 국회의원 가운데는 남로당계열도 있었지만 성시백계열의 인물도 있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의 핵심인물 노일환은 남로당과 연결되어 있었고, 황윤호 등은 성시백선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남로당은 조직적으로 국회에 침투했고, 성시백은 개별적으로 선을 넣었다. 1950년 단독선거가 확정된 이후에는 5ㆍ30총선을 대비해 공산당원과 남북협상파의 입후보를 지원하고 선거자금을 댔다. 성시백 지하공작의 백미는 군대였다. 그는 1948년 9월부터 육군․공군․해군에 첩보망을 구축해, 국군과 미군의 군사정보를 탐지해 북로당에 통째로 넘겼다. 1949년 5월부터 성시백은 ‘국군 흔들기 공작’을 추진한다. 그는 북로당의 지시에 따라 조직원인 표무원․강태무 소령에게 지시해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8연대 1대대와 2대대를 월북시킨다. 국군에 사단도 없던 시절, 2개 대대의 월북은 충격이었다. 9월에는 공군에서 근무하던 조직원 박용석을 통해 비행기를 월북시켰고, 1950년 3월에도 비행기 2대를 월북시켰다. 1949년 9월에는 미군 초계정이었던 1,900톤급 킴볼스미스호를 월북시켰고, 1950년 3월에는 해군 소함정 강철호를 월북시켰다. 육․해․공군을 망라한 잇단 월북사건으로 가뜩이나 열악했던 국군은 전력상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사진4]  평양에 도착해 주민들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강태무ㆍ표무원 부대원들  국군 제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 강태무와 표무원 소령은 육사 2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기생이다. 1948년 초부터 성시백의 프락치로 활동했다. 강ㆍ표부대 부대원들은 입북후 함북 회령에 위치한 인민군 제3군관학교에 편입된다. 그리고 강태무와 표무원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제766군부대(해병대) 대대장으로 참전해 부대를 이끌고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임원해안에 상륙했다.  ⓒ국방부,『한국전쟁사』1권, 1967

<공작의 달인>

   성시백의 행적을 보면, 늘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정보와 공작을 책임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공산당원으로 국민당지역에서 공작하면서 국민당 첩보기관 남의사나 일제 첩보기관에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다. 남한에서도 3년 동안 공개 활동을 하면서도 거의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가히 ‘공작의 달인’이다. 그가 북로당 직계로 남파된 것은 이 같은 첩보능력과, 임시정부 인물들과의 인맥 때문이다. 사실, 남한의 3개 좌익정당이 합당해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할 때 많은 중간파와 좌익 정치인들이 떨어져 나왔다. 이 정치낭인들이 할 일이라고는 사랑방에 모여 바둑을 두거나, 소담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 서울 창신동에 있던 ‘정치복덕방’이 대표적 장소였다. 남로당에서 배제된 이들은 북로당으로부터 분파행위로 비판받을까 두려워 섣불리 정치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손을 뻗은 것이 성시백이다.

   물론 당시 ‘권위 있는 선’으로는 이정윤선, 서중석선, 이영선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성시백선이 김일성의 직계라는 사실을 안 정치낭인들은 너도나도 선을 닿기 위해 분주했다. 그들은 사랑방에 모이면 귀에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네 ‘권위 있는 선’을 아는가?” 권위 있는 선. 당시 정치낭인들은 성시백선을 그렇게 불렀다. 북로당이 별도로 성시백선을 가동한 이유는 좌익3당 합당과정에서 남한의 좌익진영이 반 토막 났기 때문이다. 박헌영 측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프락치공작을 벌이자, 이에 반발한 이들은 별도로 떨어져나가 ‘사회로동당’을 만들었다. 남로당의 자파 중심적 프락치공작은 한국전쟁 후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비판받게 되는 원인중 하나가 된다. 북로당은 사로당 해체를 결정하는 한편, 성시백선을 가동해 이들을 결집하고자 했다. 남한 좌익진영을 강화하는 동시에, 남한에 북로당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사진5]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  왼쪽부터 김약수 국회 부의장, 노일환, 이문원, 박윤원 의원이다. 이것이 1949년에 발생한 한국 최초의 현역 국회의원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의 담당검사가 오제도 검사였다. 이들 중 노일환과 이문원 의원이 남로당계통이었고, 김약수와 박윤원은 이들로부터 포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으로 현역 국회의원 13명이 검거되었다. 1949년 11월 17일 첫 공판이 열렸고, 1950년 3월 14일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노일환과 이문원은 징역 10년형을 받고, 김약수, 박윤원은 징역 8년, 김옥주, 강욱중, 황윤호, 김병회는 징역 6년, 오택관은 징역 4년, 이구수, 최태규, 신성균, 서용길, 배중혁은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이들 중 황윤호, 김옥주, 강욱중, 김병회, 배중혁, 최태규가 성시백 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심리를 진행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모두 형무소에서 풀려났다. 그 후 월북해 정식으로 노동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남로당계통의 인물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된 날을 입당일로 잡았고, 성시백선에 있던 사람들은 성시백과 연결된 날짜를 입당일로 인정했다. 서용길만 월북하지 않았다.  ⓒ네이버 블로그 – 케말파샤

<명동백작>

   성시백의 공작자금은 북로당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 북로당은 공작자금이 발각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공작자금을 직접 만들었다. 성시백은 1948년 2월 남북교역이 금지될 때까지 56차에 걸쳐 명태와 카바이드 등 총액 1억 원이 넘는 물자를 반입해 공작자금을 충당하였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조선중앙일보』등 10여 개의 언론기관도 경영했다. 그는 이 자금을 가지고 무려 30개에 달하는 단독주택을 현금으로 구입해 비밀아지트로 썼다. 그의 첩보활동무대는 당대의 번화가 명동이었다. 늘 깔끔한 신사복에 중절모 차림으로 명동일대를 휘저으며 고관대작들을 만나고 다녀 이른바 ‘명동백작’으로 불렸다. 그를 체포한 이들은 국군 방첩대 김창룡 소령과 서울지검 반공검사 오제도, 육군정보국장 장도영이 만든 ‘군검경 합동수사대’였다. 성시백 검거에는 서울시경 사찰과도 한몫 했는데, 그중 한명이 사찰과 대공분실장 백형복 총경이다. 그런데 백형복은 한국전쟁 직전 사찰과의 비밀문서를 잔뜩 챙겨서 돌연 월북한다. 80년대로 치면 남영동 대공분실장이 월북한 것이다. 경찰의 대공수사 책임자가 월북이라니. 그 후 백형복은 1953년 박헌영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북한에서 사형 당한다. 성시백, 김삼룡, 이주하 모두, 그가 사찰과에 있을 때 체포되었다. 뭔가 있다.

   당국에 체포된 성시백은 자신이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간첩활동을 했음을 순순히 시인했다. 단, 그가 포섭한 인물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다. 지금까지 이 사건과 관련해 체포된 사람 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4명뿐이다. 그들은 정치위원회 부책임자 김명룡(당시 49세), 김윤원, 이광천, 성시백의 운전수 이수일(당시 31세)이다. 이들도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취조를 받다가 1950년 6월 8일 송청되었다. 부책 김명룡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성시백의 서울 중동학교 후배로 일제 강점기 국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했다. 그는 성시백 사건으로 체포된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출옥한다. 그런데 김명룡은 인민군 후퇴 시에도 월북하지 않고 서울에 남는다. 서울수복 후에도 지하활동을 펼치다 1950년 11월에 군경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된다. 그가 서울에 잔류해 살아남은 성시백선을 관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성시백이 선을 넣은 곳은 언론계, 문화계, 우익, 임정요인, 중간파 정치인, 남로당에서 떨어져 나온 정치낭인, 미군정청, 방첩대, 그리고 국군 등 헤아릴 수 없다. 체포된 사람만 112명. 촘촘한 점조직으로 조직을 구축한 ‘성시백선’은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3배 이상이라고 회자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국군 지휘부는 파티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전군에는 휴가령이 내려졌다. 전쟁 직전 전군에 인사발령이 내려져, 막상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사단장이 참모들의 얼굴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우연’들이 드러나지 않은 ‘성시백선’이 움직인 결과라는 설도 있다. 1958년 11월 11일 대검찰청은 대남간첩 총지휘소의 윤곽을 포착했다고 발표했는데, 이 총지휘소가 과거 성시백 사건과 서중석 사건의 잔당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이들이 간첩의 핵심층을 이루고 있다고 분석했다. 검찰은 “6․25사변 전 우리 사찰진은 남로당 계열은 95%의 검거율을 보였으나, 북로당계열이며 중공파인 성시백 계열은 검거율이 30%에 불과하며 서중석 계열은 50%를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사진6]  체포당시 언론에 보도된 성시백의 사진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시백의 사진이다. 당시 변장을 위해 수염을 길렀다. 꾹 다문 입술에 사진기를 노려보는 눈매가 날카롭다.  ⓒ동아일보, 1950.5.26.

<서대문형무소>

   1950년 2월 15일 검거된 성시백은 합동수사대에서 조사를 받는다. 그 후 서울지검에 넘겨져 사상검사 선우종원으로부터 조사를 받다가 6월 17일 돌연 군부로 이관된다. 그로부터 8일 후 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6월 27일, 서울을 탈출하던 국군 방첩대 요원들은 경희궁을 지나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간다. 그들은 형무소에서 성시백을 끌어내 총살한다. 당시 56세였다. 시신은 아무도 수습하지 않았고, 사망 장소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성시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남로당 남한총책 김삼룡․이주하도 같은 날 끌려나와 남산에서 총살당했다. 성시백과 달리 김삼룡과 이주하의 시신은 인민군 점령 후 수습된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이주하의 형 이춘하다. 이춘하와 그의 비서 김용환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남산에서 두 사람의 시신을 파내어 청량리 홍릉에 매장했다. 분묘도 만들고 비석도 세웠는데, 비문에는 두 사람의 ‘투쟁 경력’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이춘하의 비서 김용환이 1951년 1월 수사기관에 체포되면서 알려졌다.

   현재 성시백의 묘는 북한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다. 시신이 없는 ‘가묘’다. 애국열사릉에는 성시백과 함께 남한에서 활동한 김삼룡, 김달삼, 이현상의 묘도 있고, 그가 정치공작을 펼쳤던 임정요인 조소앙, 김규식, 엄항섭의 묘도 있다. 특이하게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가묘도 있다. 북한은 사후 성시백에게 ‘공화국영웅 1호’ 칭호를 내린다. 1990년대에는 성시백을 주인공으로 <붉은 단풍잎>이라는 7부작의 영화도 만들었다. 성시백은 남파 전 이미 결혼을 했었는데, 부인의 이름은 민순임이다. 부부는 슬하에 삼형제를 두었다. 성시백은 죽기 전 형무소로 면회 온 부인에게 “이제 우리 세상이 온다. 그때가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김 주석을 찾아가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민순임은 전쟁 때 삼형제를 데리고 월북한다. 큰아들 성세창은 조선사회민주당(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의 후신) 중앙위원회 참사를 역임했다. 둘째아들 성녹창은 인민군 정치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 셋째아들 성자립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2002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때 북측 부단장으로 한국에 왔었다. 큰아들 성세창은 2006년 사망했는데, 그는 아버지가 있는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늘 ‘그림자’처럼 살아온 성시백이었기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진도 거의 없고, 얼굴도 정확히 모른다. 요즘도 가끔 명동거리를 걷다보면, 신사복에 중절모를 쓴 명동백작과, 김창룡의 방첩대 대원들이 명동을 무대로 벌였던 치열한 정보공작이 떠오른다.


[사진7]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는 성시백의 묘  생몰년을 보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날인 6월 27일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젊은 시절 성시백의 얼굴이다. 사진이 아니라 북한작가의 그림이다. 왼쪽에 임정요인 조완구의 묘도 보인다. 북한은 망자의 활동에 따라 묘비명을 달리 적었는데, 성시백에게는 ‘동지’, 조완구에게는 ‘선생’이란 호칭을 새겨 넣었다.  ⓒ민주노동당 인터넷기관지 판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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