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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탄생, 순사와 숙군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2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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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1948년 5월 8일. 5.10단독선거를 이틀 앞두고, 경찰이 압수한 죽창. 저 단순한 나무때기에 해방이후부터 6․25전쟁까지 수천 명이 죽어나갔다. 저 죽창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아마 경찰서에 잡혀가서 아작이 났을 거다. 

   순사(巡査). 일제강점기 경찰의 최하위 계급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순경’이다. 위의 사진에 등장한 순사분의 얼굴은 마치 밭 매다 나온 시골농부처럼 순하게 생겼지만, 이때 당시 순사라면 ‘우는 애도 울음을 멎는다.’고 할 정도로 엄청 무서웠던 분들이다. 저 분들의 한마디에 생과 사가 오락가락했다. 저때부터 유신 때까지. 1948년 정부수립 전까지만 해도 경찰이 군보다 훨씬 더 무기와 장비가 좋았다. 미군은 경찰한테는 신무기인 칼빈(연발식)을 주고, 군인들한테는 일본군이 쓰던 38식, 99식 장총(단발식)을 주곤 했다. 위 사진을 보면 순사분의 복장이 제법 세련되어 보이는데(당시에는 엄청 세련된 거다) 이것도 미군이 새로 만들어 준 경찰복 되시겠다. 군인들은 처음에 옷이 없어 대부분 일본군복을 입었다.

   그럼 왜 미군은 경찰만 예뻐했을까? 그 이유는 해방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직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있다는 걸 안 들키기 위해 군대양성에 소극적인 것처럼 포장했다. 허나 1946년 초부터 양국은 남한과 북한에서 은밀히 군대를 양성하였다. 하여 미군정은 군대를 ‘남조선국방경비대’라 이름 짓고, 경찰의 예비조직으로 규정했다. 예비조직이다 보니 장비부터 급식까지 모든 면에서 경비대가 경찰보다 딸렸다. 심지어 경비대 계급장은 경찰 모자의 단추(무궁화모양)를 갖다 썼으니 말 다했다. 경찰이 갑(甲)이 된 이유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도 크다. 이분께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노상 ‘북진통일’을 주장하시었다. 헌데 당시 소련과 한반도를 분할점령을 하고 있던 미군 입장에서는 북진통일론이 매우 난처했단다. 왜냐하면, 국군이 북진하면 이북을 점령한 소련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종전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또다시 소련과 전쟁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하여, 미국은 국군에는 공격형 무기를 주지 아니하고, 방어용 무기만 지급했으며, 최신무기와 장비도 지급치 아니하였다. 개전 당시 국군이 일방적으로 당한 이유 중 하나다.


[사진2]  국방경비대 장교(왼쪽)와 경찰간부(오른쪽). 확연히 차이난다. 경비대 장교는 후줄근한 일본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 반면에 경찰간부는 물론, 뒤에 서있는 순경들까지 말끔한 제복차림이다. 순경들이 들고 있는 총이 미제 칼빈 소총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경찰과 군의 관계는 견원지간보다 나빴다. 얼마나 나빴나 하면,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배로스 중령은 경비대와 경찰의 충돌이 거의 1주일에 1회 꼴로 발생한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군인들이 휴가를 나가면 경찰과 패싸움을 벌이고, 심지어는 경찰과 군인들이 총격전도 벌어졌다. 광주에 있던 4연대에서는 부대원이 경찰에게 맞고 돌아오자 2중대장 최홍희가 전체 부대원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군대 태권도의 기원이다. 가장 큰 충돌사건은 1947년 6월 전남 영암에서 발생했다. 6월 1일 영암군 신북면 출신 4연대 하사가 귀대 중에 경찰과 시비가 붙어 영암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그런데 신병을 인수하러 간 4연대 장교와 헌병들까지 경찰과 충돌했고 연행되었다. 사건 경위가 4연대에 알려지자 병사 300여 명이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기고에서 실탄을 꺼내 트럭을 나눠 타고 영암경찰서를 습격했다. 기관총이 난사되는 교전 끝에 4연대 병사 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수습하러 출동한 연대장 이한림 소령도 체포되는 수모를 당했다. 경비대의 완패였다. 이와 같은 군경충돌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에도 영향을 미친다. 당시 14연대에는 4연대 출신 장교와 하사관이 많았다. 이들은 사건 당일 하사관들이 장병들에게 “경찰들이 쳐들어온다. 응징하러 가자”고 선동했는데, 대다수의 부대원들이 바로 동조했다. 그리고 여수와 순천에 진입한 후 반란군은 가장 먼저 경찰관을 찾아내 처형했다.


[사진3]  도열해 있는 국방경비대원들. 얼핏 봐서는 일본군과 구별이 안 된다. 각반까지 일본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으며, 모자 마크만 새로 붙였다. 총도 일본군이 쓰던 장총이다. 이처럼 무기가 열악했기 때문에 영암사건 당시에도 경비대는 경찰이 쏘는 기관총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과 군인이 견원지간이 된 데에는 미군의 대한정책이라는 표면적 이유보다 더 본질적인 사연이 숨어있다. 다들 알고 있듯 해방직후 경찰의 대부분은 일제경찰출신이다. 그런데, 이분들은 주민들이 엄청 싫어했다. 쌀 뺏어가고, 그릇 뺏어가고, 창씨개명안하면 패고, 남자들 징용 보내고, 여자들 위안부 보내고, 독립운동하면 잡아다 고문하니 싫어하는 분들이 참 많았더랬다. 이 고문의 기술을 현대에 그대로 전수받은 분들이 남산 중앙정보부와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요원들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었는데도 이런 분들이 계속 경찰을 하니 주민들이 아주 싫어했다. 하여 경찰과 대판 싸우고 잡힐 것 같으면 군대로 도망쳐 버리거나, 아예 처음부터 군인이 되서 경찰을 누르겠다고 마음먹고 입대하거나, 좌익 활동을 하다 체포를 피해 입대한 청년이 아주 많았다. 이런 사람들이 입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만 해도 군대는 신원조회를 안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나름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원칙으로 그리하였다. 특히 국군에서 하사관들의 좌익비율이 높았는데,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가 신병을 뽑을 때, ‘이승만과 김일성 중 누굴 존경하는가?’를 물어 ‘김일성’을 존경한다고 대답한 사람들만 합격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리하여 군에는 반경찰분위기와 좌익분위기가 농후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군에 들어간 청년들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군대를 휩쓴 ‘숙군(肅軍, 군내 좌익색출)’때 잡혀서 대부분 처형당한다. 이때 육사 2기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체포되었더랬다. 남로당원이었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군대내 남로당원들을 자백하고 처벌을 면하였다. 이 숙군당시 대표적인 처형장소가 현재 서울시 은평구 ‘수색’이다. 숙군 관련자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 아침에 판결을 받으면 오후에 바로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전쟁 전 1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수색리 야산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사진4]  숙군과정에서 좌익혐의를 받은 군인들의 총살장면이다. 1950년 4월 서울시 은평구 수색에서 미국 군사고문단이 찍은 사진이다. 첫 번째 사진은 미리 박아 놓은 말뚝에 헌병들이 좌익 군인들을 포박하는 장면이다. 두 번째 사진은 포박이 끝나고 2열 횡대로 도열해 군인들을 정조준하고 있는 장면이다. 왼쪽에 권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지휘 장교다. 세 번째 사진은 총살 후 시신에 묶인 포승줄을 푸는 장면이다. 일본군대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에 과녁을 붙여놓고 쐈다. 총살이후에는 지휘 장교가 권총을 가지고 처형자의 머리를 정조준해서 일일이 확인사살을 했다.


숙군 당시 막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이라는 미군 대위다. 1918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하우스만은 1946년 7월 한국에 파견된다. 당시 28세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으로 있던 배로스 대령이 제주도지사로 발령이 나자, 일개 대위인 하우스만이 경비대 총사령관 역할을 한다. 창군과정에서 ‘실전경험’을 중요시해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중용했다. 그는 광복군 출신을 싫어했는데, 이유는 광복군 출신들이 ‘장개석군대의 부속품같은 존재’이며, 공산주의를 적대시하지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우스만은 이승만 대통령이 총참모장으로 김석원을 임명하려 하자, “대통령 각하, 만약 채병덕을 총참모장직에서 해임시키고 김석원을 임명한다면 미군사고문단을 철수시킬 것입니다”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숙군과정에서는 박정희 대위의 사면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권유했다. 스스로 ‘한국 국군의 아버지’라 칭했던 자뻑남으로, 공산주의에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숙군과정에서 전권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사실 숙군과정을 진두지휘한 이는 따로 있으니 그가 바로 김창룡이다. 김창룡은 일본이 첩보원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나카노 정보학교를 졸업하고 헌병 오장까지 진급한 인물로, 1941년부터는 소만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공산당에 대한 첩보활동을 펼쳤다. 해방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옥해 월남했다. 육사 3기로 졸업한 후 육군본부 정보장교로 근무하며 군대내 좌익색출을 주도했다. 대공 첩보요원출신이자 소련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은 그는 좌익색출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는 숙군과정에서 본인의 진가를 발휘해 ‘스네이크 김(Snake Kim)’으로 불리며 활약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9년 6월 초대 육군방첩대장에 임명된다. 김창룡은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독대할 만큼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다. 그는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면서 좌익사건을 정치사건에 이용하기 시작한다.


[사진5]  이승만 대통령에게 훈장을 수여받는 김창룡 육군 특무대장. 당시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는 장교는 극히 드물었다. 김창룡은 그 후에도 부산정치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사건’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이범석의 족청계를 숙청하기 위해 ‘정국은 간첩사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1956년 1월 30일 원효로에서 허태영 대령 등 4명의 군인에게 암살당한다. 그의 묘는 국립현충원에 있고, 묘비는 역사학자 이병도가 썼다.


대표적인 사건이 ‘혁명의용군사건’이다. 정부는 1948년 10월 5일 ‘내란음모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한다.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젊은 장교들과 공모해 국방경비대 내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정부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이다. 오동기와 함께 최능진이란 민간인이 ‘내란음모혐의’로 체포되었다. 최능진은 1899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났으며, 미국 스프링필드대학 유학중 흥사단에 입단해 독립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귀국 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도산 안창호와 함께 2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다. 해방직후 경무부 수사국장(현 경찰청 수사국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친일경찰 등용에 반발했다가 파면되었다. 1948년 5․10선거 때 이승만 박사가 입후보한 동대문에 출마해 ‘이 박사가 되서는 안 된다. 그는 독재를 좋아해 도저히 민주주의가 안 될 것이다. 우리라도 이건 막아야 한다’라고 역설했던 사람이다. ‘혁명의용군사건’은 김창룡이 오동기 소령을 잡아다가 취조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김창룡은 오동기에게 최능진과 모의해 반란을 음모했다고 자백하라며 고문한다. 그러나 오동기는 최능진을 만나본 적도 없었다. 오동기는 1901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고, 중국으로 건너가 군관학교인 운남강무학당을 졸업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후 조선인 대대를 이끌고 산동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펼친 인물이다. 해방 후 육사 3기로 졸업해 경비대사령부 감찰총장을 맡았다. 이때 김종석 중령 등에 대한 표적감찰문제로 미 고문관․상관들과 여러 차례 충돌했었다. 김창룡은 ‘내란음모사건’을 통해 이승만 박사에게 대항했던 최능진을 응징하고, 눈엣가시 같던 오동기를 쫓아낸 것이다. 오동기는 10년, 최능진은 5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이 최능진의 큰아들이 정수장학회 전 이사장 최필립이다. ‘정치인, 간첩, 내란음모’라는 현대사의 전형적인 정치공작은 이렇게 김창룡에 의해 화려하게 등장한다.

   다시 하우스만으로 돌아가 보자. 하우스만은 군사영어학교에서 장교로 탁월한 자질을 보인 김종석을 총애했는데, 자기후임 정보책임자로 키우려 했다. 김종석 중령은 1918년 서울출생으로, 경성고보를 나온 엘리트다. 두뇌가 명석하고 학구적이었다는 후문이다. 일본육사에 지원해 56기로 졸업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육사 1년 선배다. 종전당시 대위로 진급해 오키나와에 있었는데, 미군에 맞서 끝까지 전투를 벌여 신응균 대위와 함께 경비사관학교 생도들에게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2연대장, 국방경비대 작전교육과장,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 대리를 역임했다. 2연대장시절, 그의 휘하에는 김재규(후 중앙정보부장) 소위도 있었다. 그러나 숙군과정에서 김종석은 남로당원으로 밝혀진다. 일본군시절 받은 반미교육과 오키나와전투 경험이 그를 남로당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숙군 피의자 가운데 중령은 그와 여순사건 당시 14연대장이었던 최남근 뿐이었다. 경비대에서 중령이 20명도 안되던 시절이다. 하우스만은 처형 장소에 직접 가서 김종석의 최후를 자신의 16밀리 무비카메라로 촬영했다. 그리고 고약하게도 이 필름을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교재’로 활용했다. 하우스만은 총살 직전 김종석을 따로 불러 마지막으로 담배 한대를 권한다. 김종석은 시종일관 웃으면서 막대를 맛있게 피고 묵묵히 처형대로 돌아간다. 미래의 참모총장감이라 불렸던 김종석은 그렇게 갔다. 1949년 9월, 수색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진6]  1949년 3월 서울시 은평구 수색에서 김종석 중령이 처형당하는 장면이다. 하우스만이 16밀리 개인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처형 장소에는 미군장교들도 입회했다. 피의자들은 곧 처형당할 것을 알면서도 하나같이 웃고 있다. 몇 분 후 처형된다. 네 번째 사진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6여단 참모장 김종석 중령이며, 그 앞이 제임스 하우스만이다. 모두 국군 장교들이며 김종석 외에는 이름을 알 수 없다. 그 시절은 그랬다. 사상이 다르면 죽였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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