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가세 구경가세 동대문안 전기회사로 활동사진 구경가세. 전차표 한장이요 담배 빈 갑 10장이면 기기묘묘 구경이 다 있네” 1906년 『만세보』라는 신문에 실린 기사이다.
1906년 조선에 진출한 영미연초회사라는 담배회사는 당시 담배시장을 주도하던 일본인과의 경쟁의 한 방법으로 한미전기회사가 운영하던 동대문활동사진소와 손을 잡고 빈 담배갑을 가지고 오면 공짜로 영화를 보여 주었다. ‘올드골드’, ‘히어로’, ‘할로’ 등의 고급 담배는 빈 값 10장, ‘드럼헤드’나 ‘골드피시’같은 값싼 담배는 20장을 입장료로 대신 받았는데 호응이 대단했다. 전차를 운행하던 한미전기회사도 이를 본따 전차승차권을 가진 사람에게 영화를 구경시켜 주었던 것이다.
영화가 세계최초로 대중에게 상영된 것은 1895년 12월 28일이다. 루이와 오귀스트 루미에르 형제사 ‘시네마토그라프’라고 이름 붙인 영사장치를 이용해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2-3분 길이의 간단한 영상을 처음 공개했다. 이듬해 4월에는 에디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가 뉴욕에서 선보였다. 둘 다 움직이는 사진이었지만 앞의 것은 오늘날과 같이 스크린에 필름을 투사시키는 방식이었고, 에디슨의 영화는 상자 속에 넣고 한 사람씩 들여다 보는 만화경 형태였다. 루미에르 형제는 영화를 상업적으로 퍼뜨리기 위해 시네마토그라프 상영단을 만들어 세계로 내보냈고, 이 상영단은 세계적으로 영화의 보급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 처음 영화가 소개된 때는 루미에르형제가 영화를 최초로 상영하던 때로부터 4년 뒤인 1899년 여름이었다. 영화와 사진전문가로 구성된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일행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왔고, 서울에 머물면서 이들은 성 안팎의 풍경과 사람들을 찍었다. ‘뚱보대감’ 이재순이 주선해서 고종에게 영화가 소개되기도 했는데, 놀거리가 궁했던 고종은 이들이 보여준 영화에 감탄해 연회를 베풀고 선물까지 주었다.
1901년 9월 『황성신문』에는 “활동사진을 본즉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으니 그 놀라움을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 활동사진 속의 사람도 저렇듯 생생하게 움직이는데 조선의 백성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나아갈 바도 알지 못한 채 활동을 하지 않으니 활동사진 속의 사람만도 못하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활동사진이 일반대중에게 공개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인을 상대로 영화를 상영한 것이 확실하다고 보이는 시기는 1903년이다. 이해 6월 『황성신문』에 다음과 같은 영화 상영광고가 실렸다. “동대문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하오 8시부터 10시까지 상영하며, 한국을 비롯 구미 여러 나라의 도시와 극장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영화들이 준비되어 있으며 입장요금으로는 10전씩을 받는다”
이 때 상영을 주도한 인물은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였다. 고종이 전액출자해 전차, 전등, 전화 사업을 하는 한성전기회사의 시설공사를 맡은 이들은 영화의 상업성에 눈을 돌려 영화광고까지 했던 것이다. 대중의 호응도 대단해서 매일 저녁 상영때마다 1천명이 넘는 관객이 찾았고, 입장료 수입이 백원도 넘었다고 한다. 이 때의 영화는 관람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야외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에 관객은 땅바닥에 앉거나 목재더미에 올라앉아 관람했다. 지금 40대이후의 분들이라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 장터에 가끔 열리던 천막 극장안에서 자리깔고 앉아서 영화 구경을 해본 기억을 되살리면 될 것이다.
한성전기회사의 영화 붐 조성에 자극을 받아 1902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실내극장이었던 협률사(協律社)에서도 1903년 7월부터 영화를 상영했다. 그 뒤 일본 활동사진회가 소광통교 부근에서 상영시설을 갖추고 1904년 12월부터 영화를 상영했다. 1906년에는 서대문부근인 새문밖 새다리(新橋) 근처에 프랑스인이 벽돌 양옥을 개조해 영화관을 만들고 일반인들에게 영화를 상영해 주었다. 극장이 늘어나면서 미국이나 프랑스, 일본들이 활발하게 수입되었다. 이때의 입장료는 10-30전 정도였고 1회 상영 프로그램은 5-10분짜리 단편영화 여러 편과 기생춤이나 판소리 등의 무대공연이 패키지 형식으로 함께 제공되었다. 그밖에도 연흥사, 단성사, 장안사 등의 극장이 만들어져 1905년부터는 영화가 일반인에게 널리 선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극장은 영화와 전통유희인 탈춤이나 줄타기 따위를 섞어 공연내용을 채웠고 본격적 영화관의 등장은 1910년 2월 경성고등연예관이 문을 연 뒤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 와다나베가 세운 이 극장은 당시로서는 첨단시설이라 할 수 있는 각종 영사시설을 구비했고, 프랑스의 파테영화사에서 수입한 영화를 상연했다. 입장요금은 특등석 1원, 1등석 50전, 2등석 30전, 3등석 20전, 4등석 10전이었고, 단체관람의 경우 5명이상일 때 1할, 10명이상이면 2할을 할인해 주었다. 이어 지금의 종로 2가 YMCA건물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우미관이 만들어지고, 계속해서 일본인들이 만든 영화관이 서울의 각지역에 섰다.
옛날 영화하면 또 뺄 수 없는 존재가 변사다. 당시에 소개된 영화는 외국영화였고 더구나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영화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장면의 해설이 필요했다. 변사는 그같은 역할을 맡아 영화와 관객의 감정교감을 위한 다리 역할을 했다. 변사는 미국 등지에서도 등장했지만 경비문제로 곧 없어져 버렸는데 일본에서는 일본전통극에서의 해설자와 같은 형식의 변사가 등장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일본영화에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기록상 최초의 변사가 등장한 것은 1907년이다. 궁중에서 고종 등 왕실 사람들에게 영화를 상영할 때 원희정이라는 왕실 소속 전무과의 기사가 영화내용을 설명했다는 기록이 있다.(『만세보』1907년 5월 12일) 대체로 이 시기에 단순한 영화해설 정도의 수준의 변사가 등장한 것으로 본다.
길게 말을 늘어뜨리며 신파조의 감정을 풀어내는 변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대중적 인기를 끈 것은 앞서의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된 뒤부터였다. 이때 이 극장 개관때 기용된 변사는 서상호였는데 입담이 구수해 인기가 대단했다 한다. 당대 최고의 변사로 불리던 서상호는 그 뒤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극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고 1938년 우미관에서 약물중독으로 객사하고 말았다.
초기의 영화는 지금 수준에서 본다면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것같은 단조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사진이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문명의 상징으로 느껴졌었다. 동네 비디오가게만 들러도 온갖 영화를 빌려볼 수 있고 TV를 통해서도 일상적으로 영화를 보고 있는 요즈음 세상에 비하면 100년 전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웃고 울리던 활동사진은 흘러간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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