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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의 사회사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1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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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은 남의 재화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저 ‘슬쩍’하는 자다. 물론 그들도 담을 넘거나 칼을 들이대는 노력 정도는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노동력이 재화에 아무런 가치를 더해주지 못한다는 면에서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노동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빼앗긴 사람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안겨주는, 사회 전체로서는 불필요한 존재다. 도둑에 ‘놈’자가 따라 붙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둑은 역사적으로 사유재산제도가 성립된 이후에 출현했다. 재화에 대한 소유의 개념이 생긴 이후에 도둑질이 생기는 것이다. 서양의 [십계]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고조선의 [팔조금법]에 도둑질한 자는 노예로 만든다고 적혀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사유가 인정되는 사회에서 남의 사유물을 훔치는 도둑은 항상 그 사회의 적이었다. 몇년전 6공때의 ‘범죄와의 전쟁’은 바로 사회의 적으로서의 도둑집단을 향한 것이었지만, 대충 ‘전쟁’이 끝난 요사이는 다시 고개를 든다는 신문보다를 자주 접하게 된다.

도둑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고 사회가 만들어 낸다는 것은 상식이다.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옛날 도둑은 대개 가난때문에 그 짓을 시작했다.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소외된 계층이 도둑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무리를 이루어 도둑떼가 되면 하나의 사회세력을 형성하고 정치적 목표를 가지기도 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도둑의 원천은 농민이었다. 지주와 관리의 가혹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이 유민이 되고 이들이 규합하여 도둑떼가 되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고, 이들은 수탈을 일삼는 관리를 오히려 도둑놈(官匪)이라고 부르고 저항했다. 신라나 고려때는 이들을 초적(草賊)이라 불렀는데 일종의 농민반란의 성격을 띠었다. 중국에서도 봉건적 학정에 저항해 일어난 세력을 초적이라 했다. 명나라 태조였던 주원장은 거지에서 도둑으로, 그리고 다시 도둑떼를 거느린 장군에서 황제가 되었다. 후삼국때의 궁예나 견훤도 초적에서 시작해서 왕이 된 인물이다.

도둑떼들이 둔거하는 곳은 보통 산이 깊어 관군의 토벌을 막아내기 쉽고, 도둑질할 거리가 있는 목이 좋은 곳이었다. 전통적으로 유명했던 지역은 경상도 운문산이나 황해도 구월산, 그리고 서울의 관악산같은 곳이었다. 이 지역들은 공물을 운반하는 간선도로를 접한 곳이어서 습격도 용이하고 산줄기만 따라 오르면 관군이 잡아내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운문산은 고려시대 김사미와 효심의 난으로 유명한 곳인데 당시 무신정권의 폭압적 약탈 아래 모여든 농민들이 봉기했고, 이들은 인근의 도둑떼와 함께 연합전선을 펴서 토벌나온 관군에게 저항하기도 했다. 훔쳐온 보물을 풀어 관군의 장군에게 상납하고 관군의 동정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싸우는 통에 관군은 싸울때마다 번번이 패했다. 이 난은 결국 장군 5명을 동원한 대병력으로 진압되기는 했지만, 2-3년 뒤에는 이 지역에 다시 발좌(勃佐)란 인물이 나타나 자칭 정국병마(正國兵馬)라고 저항하며 초적질을 하기도 했다.

구월산이야 조선시대 명종때의 임꺽정이나 숙종때의 장길산 같은 인물들이 근거지로 삼은 데라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지역이다. 이들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여 농민만 연합세력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던 상공업세력과도 손을 잡았다. 장길산은 당시 신흥종교집단이던 미륵신앙을 추종하는 세력과도 손을 잡았고, 서울의 소외된 양반이나 서자출신들과도 연계를 맺고 정권장악의 기도까지 했다.

도둑떼는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세력에 거치지 않고 반외세의 항쟁을 벌이기도 했다. 고려때 몽고가 쳐들어 왔을 때 마산의 초적들이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싸우려 했고 관악산의 도둑들도 대몽항쟁에 적극 가담했다. 임진왜란때 의병 중에도 이들이 끼어 있었고, 이들이 성장하자 정부가 이들을 도둑으로 몰아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의병중에는 왜군을 향해 겨누던 칼을 돌려 서울근처까지 진공하면서 봉건정권을 뒤집으려던 시도도 있었다. 김주영의 소설 {활빈도}로도 유명한 한말의 활빈당도 개항장에다 반일의 구호를 내걸고 일본상인을 습격하기도 했다.

조선말기는 도둑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둑떼의 활동이 많았다. 조선말기의 도둑을 흔히 화적(火賊)이라 부르는데 명화적(明火賊)의 준말이다. 관가나 부자집을 습격하고 볼일이 끝나면 반드시 불을 놓고 가기 때문에 얻어진 이름이다. 이들중에는 땡추라는 중 도둑떼도 있었다. 요즘도 중답지 않은 중을 땡추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은 여기에 있다. 1890년대 초 삼남지방의 화적 대두목은 양산 통도사, 안동 용담사, 고성 안정사, 의령 수도사의 승려였다고 한다. 절에서 화적떼가 체포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원래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승려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다가 밑바닥 삶을 살면서 호구지책으로 승려가 되는 사람들도 많아 다른 화적떼나 그 성향이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개항이후의 화적은 농촌이나 도시의 빈민, 영세상인층이 기본을 이루고 군인, 전직관리, 노비 등의 참여도 많았다. 규모는 수백명인 것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수명에서 수십명이 보편적이었다. 이들 소단위 집단은 두목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한 번 약탈행위를 한 뒤는 뺏은 물건을 갖고 혜어지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 집단을 이루고 도둑질을 했다. 이들은 배신자를 살해하고 가명을 이용해 비밀유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자체적으로 [적안(賊案)]이라는 화적의 규율을 만들어 조직을 관리하기도 했다.

화적의 조직구성을 잘 보여주는 예는 1888년 11월 전라감영에 체포된 지리산 화적집단이었다. 이들은 대장, 중군장, 후군장, 만사공공(萬事工公), 봉군(峰軍), 점주(店主), 와주(窩主)로 구성되어 있었고 지리산 깊은 계곡에 산채를 가지고 있었다. 만사공공은 제반일을 주선하는 직책인 것같고, 봉군은 인근 지역에 살면서 장물을 중개하고 정보를 제공하고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점주는 왕래할 때 숙식을 제공하고, 와주는 약탈한 장물을 처리했다.

화적 중에는 초기의 약탈성에서 그치지 않고 1880년대이후에는 홍길동식의 활빈(活貧)의식을 보여 끼니를 거르는 집에는 먹거리를 넣어주는 집단도 있었다. 빈농출신의 이들은 누구보다 배고픔의 설움을 알았던 것이고 이들의 활동에는 일종의 평등주의적 열망이 반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후기로 갈수록 단순한 도둑떼로서가 아니라 반봉건 반외세 사회운동으로서의 활빈당운동을 전개했고, 1894년 농민전쟁때는 농민군으로, 1905년이후 을사조약에 반대해 의병이 봉기하는 시점에서는 의병활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근대의 도둑집단은 구성원이 사회적으로 불만을 가진 다양한 소외계층을 수렴하는데다가 약탈의 차원을 넘어 집권계급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아 그동안 문학작품에서 자주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중국의 {수호지}가 그렇고, 우리 현대문학의 백미로 치는 홍명희의 {임꺽정}이나 황석영의 {장길산}도 도둑떼의 역사적 진보성을 다룬 것이었다. 최근에 나오는 대중소설 중에도 무협소설식의 폭력성을 적당히 섞은 ‘깡패소설’류가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기도 한다. 돈이 모든 사회적 가치의 척도가 되어버린 지금 사회에서, 기댈 학벌도 재력도 없는 자가 오직 주먹 하나만으로 입신해 돈과 여자를 움켜지는 과정은 많은 독자를 가지는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사유재산제도가 존재하는 어느 사회에서나 도둑이 없을 수는 없지만, 사회적 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도둑떼의 발생이 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범죄없는 사회를 꿈꾸는 인류의 이상은 범죄자의 예비군인 사회적 소외계층이 광범하게 존재하는 한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인류의 이상인 범죄없는 ‘평화’를 공권력의 범죄와의 ‘전쟁’만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도둑은 바로 사회적 산물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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