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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와 콩쥐팥쥐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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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동화책에는 공주가 많이 나온다. 엄지공주, 백설공주, 인어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신데렐라… 아니, 신데렐라는 공주가 아니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의 평민이다.

그런데 이 공주들이 함께 만나는 경우는 없다. 물론 요즘 만들어진 디즈니의 만화영화 쯤되면 간혹 둘 이상의 공주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전래동화에서는 찾기 어렵다. 공주들이 만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만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중세의 봉건적 장원경제는 자급자족적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성을 갖는 경제단위여서 장원간의 교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장원의 주인인 봉건영주의 딸 공주 역시 하나의 동화적 사건에서 최고의 미모와 지성을 가진 인물로 이야기의 정점에 서게 되고 다른 공주와 마주치지 않아도 사건의 전개에는 아무런 차질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공주이야기에는 끄트머리 쯤해서 반드시 다른 나라 왕자가 등장하지만 결혼을 전제로 한 양념같은 존재여서 없어도 이야기에는 문제가 없다.

아 그러고 보니 안델센의 ‘인어공주’에는 땅 위의 공주도 함께 등장해 인어공주와 사랑 경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델센은 근대 자본주의의 초입에 살던 사람이다. 시장에서 일상적으로 인간이 만나고 경쟁이 생활화된 사회에서 만들어진 동화가 중세의 동화와 같을 수는 없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마녀의 저주에 의해 물레에 손이 찔려 백년동안 장미숲으로 둘러싸인 성안에서 잠을 잔다. 백년이 지나 잠을 깨어도 세상은 백년전과 마찬가지고, 공주는 여전히 공주의 지위를 잃지 않는다. 이 동화는 가장 중세적 동화로 생각되어지는데 사회의 모든 부문이 경쟁으로 점철되는 요즘 같은 산업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백년의 잠’이후 변하지 않는 세상이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한 몇년만 변화하는 소비자의 기호나 기술력의 축적을 등한히 해도 공룡같던 대기업이 넘어지는 세상에 ‘백년의 잠’이란 꿈같은 이야기다. 백년을 자고나도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지 않는 사회는 중세적 농경사회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신데렐라는 공주가 아니다. 재투성이의 천한 신분의 평민이 유리구두 덕분에 정말 ‘어느날 갑자기’ 왕비로 신분상승을 한다. 사회적 신분이 고착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이같은 ‘신데렐라의 꿈’은 비단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 역시 꿈꾸는 이상이다. 요즘 TV나 영화의 ‘사랑과 야망’식의 이야기에는 반드시 이 ‘신데렐라의 꿈’이 양념처럼 끼어 다니고 그 꿈을 이루는 과정이 허망할수록 드라마의 시청률도 높다. 물론 이 하루 아침에 일확천금하는 신화가 정서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사회가 결코 건강한 사회일 수는 없다. 사회적 신분의 차이가 정상적 인간의 활동이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넘을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데렐라의 동화는 단순히 신분의 수직상승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의 사회적 배경을 담고 있다. 서구에서는 16,7세기 경쯤되면 그 이전과는 다른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귀족들만의 파티에 귀족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고 기름기도 더 흐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귀족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귀족보다 더 귀족다운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평민에서 부를 축적한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 장차 부르주아지로 변신할 계층이 이들이다. 이들은 상업으로, 상품생산으로, 또는 고리대로 부를 축적한 자들이었고 종래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던 신분개념으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현상을 위해 경제적 지위를 표현하는 ‘계급(class)’이란 말이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동화는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만들어 부를 축적함으로써 왕자나 공주와 같은 계급적 위치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느 공주이야기보다 봉건시대 말기의, 근대에 가까운 이야기로 생각된다.

이 동화의 뒷이야기를 역사적 사실과 관련해서 새로 만들어보자.

유리구두를 만들어 신분상승한 신데렐라는 계속 유리구두를 팔아 부를 축적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백설공주도 찾아다니고, 엄지공주의 발크기에 맞는 유리구두도 만들고, 구두가 필요없는 인어공주에게까지 세일즈를 한다. 에스키모인에게도 냉장고를 파는 현대의 세일즈맨과 같이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시장 확대를 위한 노력은 땅 위나 물 속에서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도 깨운다. 잠자는 공주는 백년의 잠에 빠진 탓에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능력은 없고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시장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신데렐라는 최소한의 재생산이 가능한 시장이 필요하고 그래서 만들어 내는 것이 소위 서구에서의 민족(nation)이다. 언어나 혈연, 지역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확대 가능한 최대한의 공동체를 국가로 만들고 그 국가내부의 인간을 민족으로 통일한다. 그러므로 서구에서의 민족은 경제적 개념이 무엇보다 우선 한다. 곧 민족은 부르주아지가 상품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창출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경우 민족 개념은 서구에 한정된다. 우리와 같은 역사적 전통을 가진 나라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단군이래로 단일민족을 자랑하는 우리의 경우 다양한 종족이 섞여 있는 유럽과 민족개념이 같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역시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라고 부를 때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통일적 시장권이 형성되고 경제적 공동체가 이루어진 이후를 말한다. 그 시기가 언제냐 하는 것은 역사학계에서도 논쟁이 많다. 세계사에서 이같은 개념의 민족이 형성된 곳은 실제로 많지 않고 대부분 제국주의 침략이후에 식민지가 되고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식민지의 민족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식민지경험을 한 나라는 제국주의국가의 민족주의가 곧 게르만주의같은 파시즘적 성향을 보이는데 비해 발생자체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란 의미에서 저항적이다. 그리고 일부 유학가서 서양물 먹고온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를 국수주의와 동격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논리적 건강성을 가지고 있다.

신데렐라의 욕망은 민족 내부의 시장에만 유한한 것은 아니다. 근대 자본주의사회 이후 ‘세계를 나의 장터로’는 상품을 생산하는 모든 인간의 욕망이다. 그래서 신데렐라는 해외진출을 꾀하게 되고 멀리는 동아시아의 한반도에까지 상륙한다.

한반도는 비록 유리구두 생산까지는 못갔지만 콩쥐가 꽃신을 만드는 수준은 된다. 신데렐라와 콩쥐팥쥐이야기의 뼈대가 닮은 것은 지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발전이 비슷했던 탓이다. 콩쥐도 심청이를, 춘향이를 대상으로 꽃신을 세일즈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구두가 들어오면서 꽃신의 시장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장화, 홍련이 꽃신보다 화려한 유리구두에 눈을 돌리게 되고 콩쥐의 꽃신공장은 장차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다. 이 때 신데렐라로 대표되는 유럽의 자본주의 세력에 콩쥐가 저항할 때 콩쥐의 자본은 흔히 말하는 ‘민족자본’이 된다. 반면 콩쥐보다 성깔이 나쁜 팥쥐는 신데렐라와 손을 잡게 되는데 이 경우 팥쥐의 자본은 바로 ‘매판자본’이다. 그리고 중세동화의 해피 엔딩과 달리 근대사회의 냉혹한 현실앞에서 콩쥐는 결국 무너지고 신데렐라와 손잡은 팥쥐가 계급적으로 상승하게 되고 만다.

지금은 잠자는 공주의 시대는 아니다. 당연히 신데렐라와 같은 시장획득을 위해 뛰는 자만이 살아남는 자본주의시대이다. 요즘 귀가 아프도록 듣는 ‘세계화’는 바로 중세의 잠에서 깨어나자는 자본의 생리를 구호로 만든 것이다. 디즈니의 만화에 여러 공주와 왕자가 함께 등장하듯이 현대는 자본의 국적도 세계적이고 시장도 셰계를 대상으로 한다. 자본이야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세계화가 필수적이고 그래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겠지만, 그 화려한 구호 뒤에 “세계도 좁고 할 일도 없어” ‘명퇴’나 당하는 서민의 찌든 모습은 ‘신데렐라’의 그늘에 가려 서점에서도 잘 팔리지 않는 ‘콩쥐팥쥐’같은 전래동화책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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