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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역사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1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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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주의가 트레이드 마크인 우리 시대의 대표적(?) 소설가 이문열씨가 요즘 신나게 혼나고 있다. 원래 관념주의란 게 현실의 역사는 저만치 떨어져 남의 것같이 보는 게 특징인데 그걸로 먹고 사는 양반인 만큼 요즘처럼 여성의 목소리가 큰 세상에 반(反)페미니즘의 논리를 내세운 소설을 팔아 먹으려 덤비니 된통 혼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지위는 사회적 노동력 구성에서의 위치와 일치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역사적 변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원시공동체의 경우 여성은 남성보다 사회적 생산력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했다. 사냥을 주로 하는 남성에 비해 여성의 채집경제는 식량을 보다 안정적으로 조달할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시공동체사회는 노동생산성이 보다 나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모계적 성격의 사회였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남성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 모든 민족의 신화에 토지는 어머니로 등장하고, 생산, 풍요,다산(多産) 기원의 신도 여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이 여성신은 대체로 폭력적 남성신보다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등장한다.

그런데 원시공동체 사회 말기에 들어 농경이 시작되면서 이같은 사회적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농경을 위해서는 남성의 근육노동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가사노동력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노동력은 농경사회에서는 부수적 위치로 떨어지고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사회가 형성되어 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신화는 농경문화의 이입과정을 보여준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은 오곡백과와 농경에 필수적인 바람과 구름과 비의 신을 데리고 이 땅에 내려왔다. 환웅과 웅녀의 결합에서 남성인 환웅이 사회적 지위에서 우위에 있는 것도 초기 농경사회의 여성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공동체의 유제인 모계적 성격은 농경사회에 들어서도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의 왕위계승 문제는 역사학계에서도 논쟁이 많은 부분인데 일반적으로 부계사회가 형성되어 왕위가 장자상속으로 이어졌다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위나 외손자가 계승하는 경우도 많아 부계로만 해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더구나 신라 말기에는 김씨가 아닌 박씨가 왕이 되는 사례도 여러차례 있었다. 박씨가 왕이 되는 이유는 사위나 외손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근래에는 왕위계승의 원칙이 부계적이 아니라 모계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다.

이같은 모계적 성격은 왕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고, 그 흔적은 고려를 거쳐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확인이 가능하다. 고려시대 고종때 손변(孫卞)이란 인물이 경상도 안찰부사로 재직할 때 일이다. 누이와 남동생이 서로 소송을 냈는데, 남동생이 누이가 돌아가신 부모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동생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둘을 같이 데려다 놓고 사연을 들어 보았다.
남동생;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데 어찌 누이만 부모의 재산을 얻고 동생은 없겠습니까?
누이;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 가산 전부를 나에게 주고 너의 몫으로는 베옷 한 벌, 유관 하나, 짚신 한 컬래, 종이 한권만을 남기셨다.
손변; 그때 너희들 나이가 각각 얼마나 되느냐?
이때 남동생은 아직 코흘리는 어린아이였고, 누이는 결혼을 한 상태였다.
손변; 부모의 마음은 만약 재산을 누이와 같이 나누어 주면 동기간의 사랑이 지극하지 않고 키우는데 혹시나 제대로 하지 못할까 두려워 함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성장해서 이 종이에 소장을 만들어 베옷을 입고, 유건을 쓰고 짚신을 신고 관가에 고소하면 장차 이를 가려줄 이 있으리라고 해서 네 가지 물건을 준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누이가 울면서 자신의 재산을 반으로 나눠 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재산분배에 남녀간의 차별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남성의 근육노동력이 우대받는 농경사회라고 하더라도 모계적 성격이 남아 있는 사회에서의 여성은 철저한 부계 중심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위치에 있게 된다. 임진왜란때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유성룡이 죽은후 재산을 나눈 기록인 분재기(分財記)를 보아도 재산 상속에 아들, 딸의 구별이 없다.

고려시대 여성의 발언권이 상당했음은 {고려사} 열전 19 박유전(朴 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충렬왕때 대부경(大府卿)이었던 박유가 상소를 올려, “우리나라는 원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나 지금 지위에 상관없이 일처(一妻)에 그치고 자식이 없는 자도 감히 축첩을 못하나 이국(몽고)에서 온 자들은 처를 취함에 한정이 없어 인물들이 장차 북으로 흘러갈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대소 신하에게 여러 처를 취하게 하고 품계를 따라 그 수를 적게 해 서인은 일처 일첩을 취하도록 하고, 서처의 소생자도 또한 적자와 같이 벼슬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이같이 한다면 과부나 홀아비가 없어지고, 호구가 증가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박유의 걱정은 단순히 남성우위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구의 사회적 증가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고려 여성들에게 박유는, 요즘 여성들에게 이문열씨가 혼나는 것과 같이 미운 털이 박히고 말았다.

어느 날 저녁 박유가 가마를 타고 가는데 한 노파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여러 처를 두자고 한 자가 저 늙은 거지 같은 놈이다”라고 하니 거리마다 여자들이 삿대질을 해대며 욕했다. 결국 재상중에 그 부인을 엄청 겁내는 자가 있어 그 의논은 중지되고 말았다.

조선초기에 만들어져 악법 중 악법으로 치는 과부된 여성의 재가(再嫁) 금지법은 원래 의도에서는 여성의 차별에 중점을 둔 것은 아니었고 양반의 수효를 줄임으로써 한정된 관직을 두고 경쟁자를 줄이려던 것이었다. 첩의 자식, 곧 서자를 관리로 임명하지 않았던 것 마찬가지 의도였다.

전근대의 우리 사회가 철저한 남성우위의 가부장적 사회였다는 통설은 조선후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적용이 가능하다. 흔히 출가외인이나 칠거지악으로 표현되는 여성을 속박하는 제도적 장치가 사회적으로 그대로 관철되는 시기는 조선후기이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종래의 양반지배 사회는 뿌리째 흔들리게 되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양반중심의 사회적 규범을 강조하는 주자학은 보다 경직된 형태로 바뀌어 갔다. 평민에 대한 양반의 우위를 강조함으로서 양반지배 사회를 계속 유지하려 했고, 그와 함께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도 강조되었다. 철저한 계급사회일수록 철저한 남성 우위사회라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역사에서 보편적 진리이다. 바로 우리의 조선후기 사회는 바로 그러한 사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 자본주의사회에 들어서면 가부장적 사회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방식은 분업인데, 이는 인간의 노동을 보다 단순하게 한다. 기계제 대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에서의 노동과정은 전체 작업과정이 아무리 복잡해도 개인이 담당하는 노동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예를 들어 보자. 조선시대에 나룻배 만드는 장인이 있었다고 하자. 그 장인은 재료인 나무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 만드는 과정, 그리고 판매까지 모든 일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요즘 현대조선에서 평생 나사못 조우는 일만 하던 양반이 정년이 되어 퇴직했다고 몇십만톤되는 배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양반은 배 하면 나사못 조우기만 알 뿐일테고, 그런 단순노동의 집합이 바로 전근대와 구별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다.

이같은 노동과정의 단순화로 근육 노동이 필요한 중공업을 제외하고는 여성과 미성년자도 사회적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가 가능해지고 상대적으로 남성의 근육 노동력은 평가 절하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남성의 노동력이 여성노동력보다 나을것이 없는 사회에서 남성우위의 세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여권주의’, ‘여성해방론’, 혹은 ‘여성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페미니즘’의 출발이 17,18세기 서양의 계몽주의 시대에서 비롯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여성도 인간이고, 만인은 법앞에 평등하다”는 구호를 내세우고 여성의 권리확보를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가 자본주의사회의 출발점이었던 것과 그대로 일치한다. 하지만 이 시기는 값싼 노동력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남성사회에 여성이 끼어들기라는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 뒤 현대사회에 들어 고도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단순 육체노동보다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는 직종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노동력 구성에서도 남성, 여성의 구별보다 개인의 능력이 우대받게 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남성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가부장제의 관습, 자본가계급의 가부장적 사고는 그대로 유지되고, 여성의 사회적지위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됨으로써 사회적 역할에 맞는 지위를 요구하는 ‘여성해방론’이 현실적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도 본격적인 의미의 페미니즘의 전개는 1960- 70년대에 들어 시작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서구보다는 늦지만 이같은 현상이 80-90년대를 통해 심화되기 시작했고, 페미니즘도 사회현상의 하나로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근래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등의 문화상품이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나 각정당이 여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에 페미니즘의 시장이 넓어져 가는 것을 반영한다.

따라서 현재 사회적으로 여성으로서의 역할이 남성 못지 않는 60, 70년대생이 중심이 된 신세대의 경우 그 여성관도 전통적 가부장 중심 세계관과는 다를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문열씨의 약점은 바로 이같은 현실의 역사를 외면한 관념주의로 아직도 버틴다는데 있는 것이고, {삼국지} 팔아 먹는 데 그칠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데서 나온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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