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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밥과 솥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1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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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솥

 

부엌이 지금처럼 현대식으로 바뀌기 전에는 아궁이가 있는 부뚜막이 부엌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고, 그 아궁이에는 솥이 걸려 있었다. 가족의 먹거리가 이 부엌에서 나오고 주식인 밥이 솥에서 만들어지니 밥짓는 부녀자들의 부엌과 솥을 모심이 극진할 수밖에 없었다. 부엌일을 맡고 있던 부녀자는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하기 전에 정화수 한 주발을 떠 놓고 손을 부비며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에게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밥과 솥이 신앙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밥을 짓는 쌀은 ‘벼 열매의 껍질을 벗긴 알갱이’다. 벼과에 속한 식물은 20여 종이 있는데 세계적으로 가장 흔히 재배되는 것은 오리자 사티바(oriza sativa)이다. 오리자 사티바는 크게 일본형과 인도형으로 나누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것은 일본형이다. 벼의 원산지에 대해서는 설(說)이 많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미안마에서 서기전 1만여년 전에 재배된 흔적이 있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와 평안도 평양에서 발견된 탄화(炭化)된 쌀이 가장 오래된 것인데 모두 3,000여 년전으로 추정한다.

쌀은 처음 들어 왔을 때는 다른 작물과 마찬가지로 분식(粉食)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현재 우리가 먹는 떡은 그것의 변화된 형태이다. 그 뒤 점차 밥을 지어먹는 입식(粒食)으로 바뀌었다. 밥을 지어 먹는 도구는 원래 시루였다. 고대 유물 중에는 시루가 많고, 황해도 안악의 고분벽화에는 부엌에서 시루로 밥을 지어먹는 광경도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고구려 대무신왕 4년(서기 21)조에 솥 정(鼎)자과 밥지을 취(炊)자 처음 나온다.

겨울 12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鼎)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炊)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어 일군(一軍)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따라서 기원 전후해서 이미 솥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는 것을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철기공업의 발달 정도로 봐서는 삼국시대 후반 쯤에 무쇠솥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으로 지금과 같은 밥을 먹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절간같이 대규모의 취사를 하는 경우에는 솥의 크기도 커서 지금도 법주사에 남아 있는 신라 성덕왕때 만들어진 솥은 높이 1.2m, 직경 2.7m, 둘레 10.8m의 거대한 쇠솥으로 3,000 승도가 ‘한 솥밥 먹는 사이’였다고 한다.

솥은 단순히 밥을 짓는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정치나 제의에서 권위의 상징으로도 기능했다. 중국의 신화에서 황하의 치수를 잘한 덕에 순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는 우는 임금이 된 기념으로 9주(州)의 주목이 바친 놋쇠를 모아 아홉 개의 솥(구정 九鼎)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솥은 주나라에까지 전해지면서 종묘에 모셔져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나아가 구정은 중국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도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이 세 개 달린 솥이 나왔는데 밥지어 먹는 솥이 아니라 향로의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권력의 상징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솥은 형벌에도 사용되었다. 가마솥에 쪄서 죽이는 팽살(烹殺)이 그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이 팽살을 가끔 행했다. 지금 동아일보사 자리 근처에 포도청이 있었는데, 부패 관리를 처벌할 때 이 형벌을 사용했다. 빈 가마솥을 걸어 놓고 그 안에 죄인을 넣고는 불지피는 시늉을 하다 꺼내어 놓아주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체면 문화가 극도로 발달한 조선사회에서는 이미 죽은 자 취급을 받아 살아 있어도 죽은 자나 같은 사회적 대접을 받았다. 부패혐의로 물러난 뒤에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선거에 당선되는 요즘의 부패가 일상화된 공직 사회에도 팽살과 같은 사회적 매장 문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쌀은 원래 열대식물이라 남부지역에서 많이 재배되어 삼한(三韓)에서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저수지도 만들었다. 삼국시대에 들면 백제, 신라에서는 국가적 사업으로 쌀생산을 장려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주곡(主穀)으로 자리 잡아 세금도 벼를 뜻하는 조세(租稅)로 불렀다. 또 논을 뜻하는 답(畓)자가 만들어진 것도 이 때였다.

쌀 미(米)자를 파자(破字)하면 팝실팔(八十八)이다. 볍씨를 뿌려 가을에 추수할 때까지 여든 여덟번의 손이 간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을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재배하려 했을까. 우선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어느 작물보다 높다. 그리고 칼로리도 여타 작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 ‘보리방귀’나 한 번 뀌면 허전해지는 보리밥과는 다르고, 먹어봤자 속이 마뜩찮은 밀가루 음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기에서 열량을 취하지 못하는 시절에 쌀밥 한 그릇은 아랫배가 뿌듯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한 땅에서 해마다 농사짓는 연작(連作)농법이 발달하면서 생산량도 늘었다. 하지만 고려가요인 「상저가」에 “들커덩 방아나 찧어 게궂은 잡곡밥이라도 부모가 잡수시고 남으면 내가 먹겠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 시대에도 쌀이 서민의 주식이 되지는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저수지의 증설, 모내기법의 도입, 개간 등의 방법으로 쌀 생산량을 급격히 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 종래 넓은 땅을 대충 농사짓던 조방(粗放)농법에서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집약(集約)농법으로 발전하면서 논의 생산력이 극대화되기에 이르렀다. 농사하면, 벼농사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고대부터 귀족들은 삼시(三時) 세 끼를 다 먹었지만 평민은 두 끼가 고작이었다고 보는데 세 끼를 먹게 되는 것도 조선후기에 들어서였다. 비료로 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인분(人糞)을 비료로 만드는 기술은 조선후기에야 가능했다. 그 이 전의 비료는 재(灰)가 고작 이었던 반면 인분이 비료로 사용되면서 쌀의 생산량은 급증했다.

그렇다고 다들 쌀밥을 먹은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쯤에는 삼남지방 정도에서 세 끼를 먹지만, 그것도 쌀이 생산될 때는 쌀밥을 보리 철에는 보리만 먹을 정도로 평민은 비축의 여력이 없었다. 함경도나 강원도 지역에서는 평민은 조나 수수로 그것도 두 끼로 때우는 실정이었다. 그러기에 조선말까지도 쌀밥은옥밥이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명절이나 제사 생일에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취급을 받았고, 물에 말은 흰밥을 『운자백』이라 하여 하늘에 뜬 구름에 비유할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이규태씨는 우리 민족이 밥을 엄청 많이 먹는 대식(大食) 습관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밥이야기를 하는 많은 글도 이 주장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그 근거는 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한 영국인 비숍여사가 주막에서 본 여행 중인 어느 가족의 식사량이 많았다는 것과 문헌 자료에 나오는 1인당 먹는 쌀 됫박의 양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우리가 지금보다 3배 정도의 밥을 먹는 대식민족이었다고 주장한다.

길 떠나면서 좀 넉넉히 챙긴 곡식자루에서 꺼내 지은 밥의 양이 많았을 수도 있다. 비축의 여력이 없던 평민으로서는 언제 곯을 지 모를 배를 채울 기회가 있다면 놓칠 리 없다. “있을 때 먹고 보자”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그 같은 식사습관에 비숍여사가 놀랐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헌 자료에 근거한 주장은 무지의 소치다. 예전 됫박의 양을 지금 됫박과 똑 같이 취급한 이규태씨의 산수는 3배겠지만 지금 됫박은 식민지시대 일본인들이 강요해 사용된 일본 됫박이고 전통적 됫박과는 다르다. 조선말까지의 전통 됫박의 크기는 일본 됫박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때나 지금이나 먹는 양은 큰 차이가 없었던 셈인데 고기나 피자도 먹는 요즘 세상에 비해 밥만 주로 먹던 예전의 밥 식사량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쌀생산량이 지금과 비교해 절대적으로 적은 옛날에 땅 많은 양반집안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양반땅 부치고 사는 평민에게는 ‘배불리 한 번 먹어 봤으면’하는 대식은 평생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문헌자료에 나오는 식사량도 항상 먹거리가 부족한 평민이 아니라 땅가진 양반네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농법의 발달에 따라 쌀의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솥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876년 개항이후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쇠냄비 같은 우리 솥과 유사한 제품이 들어 왔지만, 우리 전통적 가마솥과는 비교할 수 없어 일제때도 여전히 우리 솥으로 밥을 해 먹었다. 19세기 후반 쯤되면 솥은 가내 공업의 형태를 벗어나서 개천의 무진대 같은 곳에서는 분업적 협업에 의한 생산이 이루어졌고, 경북 청도의 한 솥 공장에는 매일 평균 40인의 노동자가 생산에 참가해 임금을 받고 있었다. 청도군 운문면 일대의 솥계 수공업은 솥의 내구연한이 100년에 이른다 할 정도로 양질의 솥을 경상도 일대에 독점적으로 공급했다. 1904년 이 지역에는 연인원 248,000명이 동원되어 약 188,000관의 원철을 사용해 18,000개 이상의 솥을 생산할 정도였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의 솥 생산은 요즘으로 치면 첨단산업에 속해 이에 투자해 떼돈 벌은 부자도 여럿 나왔다.

사진은 식민지 시대 것으로 밑이 닳아 못쓰게 된 솥을 수선하는 광경인데 우리 솥의 역사 만큼이나 살아 온 풍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노인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1876년 개항이후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쌀을 수입해 가기 시작했다. 중국쌀이나 월남쌀에 비해 우리 쌀이 일본인의 기호에 맞았고, 자본주의의 발달로 노동자의 식량확보를 위해서도 우리 쌀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뒤로 갈수록 우리나라에 식량을 의존하는 양이 많아졌고 식민지 때는 아예 우리나라를 쌀을 공급하는 식량기지로 만드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래서 쌀의 생산력은 높아졌지만 잡곡 생산력은 줄어들어 사회전체의 농업생산력이 반드시 늘어났다고만 이야기하기 어렵다. 만주에서 잡곡을 들여와야 겨우 수출해 나간 쌀만큼을 식량으로 보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밥 한 번 배불리 먹었으면’ 하는 보통사람의 비원이 완전히 풀리는 것은 1970년대 들어서 였다. 벼 품종 개량 등으로 쌀 생산이 급증하고 경제력이 나아지면서 이 때쯤에야 밥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비원도 풀렸다.

지금이야 빵이나 피자가 우리 먹거리 속으로 파고들어 밥만 먹고 사는 세상이 아니고 솥도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전기밥솥으로 바뀌었다. ‘한 솥밥 먹는’ 가족의 규모도 대가족 중심의 옛날과는 다른 세상이다. 하지만 형태는 바뀌었어도 여전히 솥으로 한 밥을 먹고 나서야 하루의 건강을 유지하는 우리 식생활은 달라지지 않았고, 밥과 솥에 소복이 담긴 우리의 전통적 정서 역시 아직은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질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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