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 종로, 전차(1)
아차산 능선 위에 있는 경계 표지판. 산 능선은 그나마 가시적인 구분선 구실을 하지만 평지에서는 작은 골목 하나가 경계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는 표지판을 보는 것 말고는 도시의 경계를 구분할 방법이 없다.
전근대의 도시는 본래가 “농촌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이었다. 이 섬의 경계인 해안선 – 도시의 성벽 – 은 누구나 명료히 인지할 수 있었고, 아무나 함부로 건널 수 없었다. 그러나 제어할 수 없는 확장 동력을 내장한 근대 도시는 자신의 경계 = 성곽을 스스로 허물면서 커 나갔다. 오늘날 도시는 더 이상 ‘작은 섬’이 아니며, 그 경계 역시 해안선처럼 명료하지 않다. 현대의 거대도시는 농촌에 둘러 싸인 공간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가진 도시에 포위된 공간이다. 한 도시를 벗어나면 곧바로 다른 도시가 나타나는 ‘연담도시’에서 공간 구조나 가로 경관만으로 도시의 경계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대머리인 사람의 이마와 머리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자동차를 타고 달릴 때, 서울을 벗어났음을 알려 주는 시각 정보는 “안녕히 가십시오. 또 오십시오. 서울특별시”라고 쓰인 표지판과 그 건너편에 “어서오십시오. 여기서부터 경기도입니다”라고 쓰인 표지판 뿐이다.
1974년 서울시 종합계획도. 이른바 삼핵도시구상과 관련하여
종로, 중구 일대의 구도심과 여의도, 영등포 일대 그리고 영동지구를 역점 지구로 설정하였다.
도시의 구분선 자체가 모호한 마당에 도시 내부의 경계가 명료할 수는 없다. 특히 오랫동안 도시 내부를 구획하는 기준점 구실을 해 왔던 도심(都心)은 이제 더 이상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오늘날의 거대도시에서 교통의 결절점이면서 행정, 산업, 문화의 중추기능이 모두 모여 있는 ‘단일 장소’를 찾거나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현대의 거대도시는 본래가 ‘다핵도시(多核都市)’이다. 1974년 구자춘(具滋春) 시장을 만난 홍익대 교수 김형만(金炯萬)이 서울을 “철학이 있는 다핵도시(多核都市)”로 만들자는 의견을 내지 않았더라도 서울은 다핵도시, 다심도시(多心都市)가 되었을 터이다. 이 때의 ‘철학이 있는 다핵도시’ 주장은 도시의 다핵화 자체를 낳은 것이 아니라 세종로에 행정부, 여의도에 입법부, 영동(永東) – 오늘날의 강남구, 서초구 일대는 한동안 영등포의 동쪽지역이라는 뜻에서 영동지구라는 몰개성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 에 사법부 하는 식으로 다소 우스꽝스러운 권력 거점의 공간적 분기를 낳았을 뿐이다.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 2004년 12월 현재 충무로 1가 24-2 명동빌딩 스타벅스 커피점 자리는 1평당 1억 3851만원을 기록했다. 최고 지가(地價)의 땅이 명동에서 충무로쪽으로 이동한 것은 최근의 재개발 탓이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 내내 충무로 = 본정(本町)이 1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여기에서도 ‘탈환’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듯 하다.
현대 서울 사람들은 각개인의 경험과 처지에 따라 도심을 달리 설정한다. 도시공간을 거리나 면적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도심은 용산이나 한남동이고, 땅값 – 같은 도시 내에서라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토지의 가격은 주택지의 가격보다 비싸게 마련이다. 상업용지가 집중한 중심업무지구(CBD = Central Bussinss District ; 소매상업과 사적 이익을 위한 다양한 사무소 활동이 지배적인 지구)의 지가(地價)는 다른 지역보다 훨신 높은데, 이 개념은 대개 도심부와 큰 차이 없이 사용된다 – 을 기준으로 도시공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명동을 도심으로 생각한다. 또 물질의 소비보다 욕망의 소비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청담동이나 대치동이 도심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설정한 도심을 기준으로 자기 동네와 자기 자신의 위치 – 어느 곳에 살고 어느 자리에 서는지가 사람의 등급을 표현하는 것이니, 지위(地位)라는 말은 참으로 절묘하다 – 를 판단한다. 서울의 도심은 분명 여러 곳이다.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도심부를 특정(特定)하고 부심(副心)을 설정하는 등의 행위들과는 별도로 사람들은 자기 자리와 눈높이에서 도심(都心)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노인(老人)들의 도심, 기억 속의 도심, 그래서 역사적인 도심(都心)은 단 한 곳뿐이다. 종로(鍾路).
탑골공원 팔각정에 앉아 있는 노인들.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은 한편으로 노인들의 탑골공원 입장을 제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는데, 그에 따라 공원 안의 노인 밀도는 줄었지만, 공원 밖에서 노인이 점거한 공간은 오히려 확장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은 ‘노인의 공간’이며, 이 두 지점을 잇는 길은 ‘노인의 거리’가 되어 있다. 노인들이 탑골공원을 거점화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부터였다. 1988년의 탑골공원 무료화가 일차적인 계기가 되었고, 1994년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한 전철 무임승차제 도입도 지하철 1, 3, 5호선이 통과하는 종로 3가역의 노인 인구 흡인력을 배가시켰다. 노인들이 이 곳을 거점으로 삼자 노인을 상대로 하는 각종 영업 – 자선활동과 무료봉사를 포함하여 – 도 이 주변에서 활기를 띠었다. 교통의 편리성과 무료 휴식공간,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의 영업적ㆍ비영업적 활동이 노인들을 이 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뿐일까. 서울시가 노인들을 탑골공원에서 몰아내기 위해 새 쉴 자리 – 경운동 서울노인복지센터 – 를 만들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은 그 곳으로 잘 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편, 종묘 쪽으로 이동하여 노인의 공간을 확장시켰다. 노인들이 탑골공원 주변을 찾는 것은 이곳이 단순히 ‘접근이 용이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곳’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일대에 그들의 ‘왕년(往年)’이 함께 머물러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종묘 앞의 노인들. 탑골공원 성역화(聖域化) 이후 종묘 부근이 노인들의 새로운 거점으로 등장하였다.
구도심(舊都心) 종로는 쇠락해 있고 더 쇠락해 가고 있는 도심(都心)이다. 그래서 그 역시 노쇠해 있고 더 노쇠해 가고 있는 노인들에게 이 장소는 그들 자신의 처지와 오버랩되는 ‘이미지의 공간’이다. 이미 일제 강점기에도 종로가 쇠락하고 있다는 물만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도 보신각 주위의 ‘종로 네거리’는 한국은행 앞 광장과 더불어 당당한 양대 도심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종로는 중심업무지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삼성 종로타워(1999년 완공)가 당당한 강북의 랜드마크로 자리잡고는 있지만, 상업가로(商業街路)로서는 아무래도 을지로나 남대문로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1960년대 말 이후 종로는 지속적으로 쇠락하였다.
1966년 광화문 지하도 건설 현장. 이 지하도를 건설하면서 세종로의 전차 궤도가 철거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시내 전차 전노선의 철거로 이어졌다.
1966년 10월 세종로쪽 전차 궤도가, 이어 1968년 11월 전차 궤도 전부가 철거된 것은 종로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0년대부터는 정부의 강남 개발 촉진책이 본격화하면서 종로를 떠받치고 있던 인적, 물적 요소들이 강남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에는 경기, 휘문 등 종로 북변의 ‘명문’ 고등학교들과 종로 동편의 서울대학교가 한강 이남으로 옮겨갔고, 주변의 입시학원들도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반도호텔과 국립도서관, 산업은행 – 옛 조선식산은행 – 자리에 롯데가 초대형 호텔과 백화점을 세우면서 상업 중심지를 남대문쪽으로 한걸음 더 끌어 내렸다. 충무로의 신세계백화점 – 옛 미쓰코시(三越) 백화점 – 과 더불어 서울의 양대 백화점으로 명성을 누리던 화신백화점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남대문로와 명동에 새로 들어선 백화점들에 밀리다가 1987년에 헐려버렸다. 화신백화점이 헐리기 전 십수년동안, 그 건물 꼭대기층에 있던 화신극장 간판에는 “매일 매일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고, ‘20세기 센츄리쇼단’라는 이름도 희한한 쇼단이 매일 공연했는데, 이 쇼단도 화신백화점 건물과 함께 소멸했다. 화신백화점 건물의 철거와 ‘20세기 센츄리쇼단“의 소멸은 종로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성이 최종적으로 붕괴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80년대까지 지식인, 대학생들의 아지트로 각광을 받던 종로서적이 인근의 대형서점,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를 당해내지 못하고 부도처리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의 일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동화서적, 양우당, 문학당 등 종로의 ’나름대로 큰‘ 서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1987년 철거 직전의 화신백화점. 이 건물은 본래 육의전의 수좌이던 선전(縇廛) 자리에 박흥식이 새로 지은 것이다. 선전은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던 곳이었는데, 선전이라는 말을 순우리말처럼 해석하여 한자로 입전(立廛)이라 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에는 종로의 최고층 건물 – 반도호텔이 서기 전까지는 전국 최고층 건물 – 이 이 자리에 세워졌으며, 이 건물이 헐린 뒤에도 삼성타워가 들어서 강북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다. 건물의 고층화는 도심의 일반적 지표 중 하나인 바, 입전(立廛)에서 화신으로, 다시 삼성으로 건물의 외양과 이름이 바뀌었지만 이 자리에 선 걸물은 모두 종로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1990년대 이후 종로 중심가 북변을 점거한 ‘노인’들이 젊었을 때의 종로, 왕년(往年)의 종로는 그 모습이 지금보다는 누추하였지만, 그 상대적 활기와 중심성은 지금보다 높았다. 명동 충무로 일대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탓에 50~60년대의 종로는 화신백화점, 동아부인상회, 영보빌딩, 한청빌딩, 명월관, 단성사, 우미관 등이 곳곳에 포진하여 ‘북촌 조선인’의 중심가로 위세를 떨쳤던 일제 강점기보다도 오히려 화려했다. 명동백작을 비롯한 숱한 저명인사들이 명동 골목골목에 진한 추억을 남긴 것 만큼이나 지금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에 모여 앉은 가난한 노인들의 ‘화려한 왕년’은 종로 피맛길의 목로주점을 무대로 펼쳐졌다.
전차가 철거된 후 지하철이 개통되기까지의 6년간, 서울 도시교통은 거의 전적으로 버스가 담당하였다. 그러다보니 출퇴근 시간대의 버스 정류장 부근은 아비규환의 혼잡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1972년, 종로.
종로의 쇠락이 전차의 철거로부터 시작되었듯이, 종로가 그나마 과거의 영화에 대한 기억을 보존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하철 1호선’ 건설이 큰 힘이 되었다. 사실 전차 철거와 지하철 1호선 건설 간에는 일반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의도적 관련’은 전혀 없었다. 1966년 김현옥 시장이 전차 철거를 결심하면서 대체 교통수단으로 지하철 건설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 도상(圖上) 계획으로서의 서울 지하철 계획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1965년에는 “고속전차시설기본계획조사보고서”라는 것이 만들어진 바 있고, 그보다 훨씬 전인 1930년대에도 박흥식의 지하철 계획과 경성부의 지하철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계획은 아무런 실현수단도 전망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 그는 누구보다도 군용 지프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 주위의 ‘승용차를 타는 높은 분’들도 대개 전차로 인한 자동차 교통의 장애에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가 본 1960년대 중반의 서울 전차는 적자 투성이의 애물단지였고, 한 대만 고장나도 줄줄이 늘어서는 고물단지였으며, 자동차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시설이었다. 그는 전차 궤도만 없어지면 자동차가 그 빈 자리를 메우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하철 1호선 개통. 종로를 관통하여 청량리에 이르는 도로의 역사성은 땅밑을 달리는 새로운 운송수단의 노선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부, 경인, 경춘선 등 기존 철도 노선 자체가 전차 노선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철도와 연계하여 수송 효율을 높인다는 지하철 건설 구상에도 ‘홍릉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셈이다.
그러나 버스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과거 전차가 담당하던 교통수요를 충족할 수는 없었다. 1968년 전차 전노선이 철거된 후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될 때까지, 종로를 관통하는 도심의 공공교통에 ‘지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과장(誇張)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젊은 여성들이 버스 차장 – 후에 안내양이라는 야릇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안내양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풀면 ‘안내하는 처녀’쯤 될 터이지만, 실상 그네들의 일에서 ‘안내’는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했다 – 일을 했는데, 차장의 업무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기사’보다 훨씬 많았다. 너무 많은 승객을 태운 탓에 옆과 뒤를 볼 수 없는 기사를 위해 수시로 몸을 차 문 밖으로 내밀고 “오라이, 스톱, 빠꾸’를 외치는 일, 요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는 일, 차량 내부를 청소하는 일, 이미 만원이 된지 오래인 차 안에 한 사람이라도 더 밀어넣는 일, 짓궂은 승객과 음흉한 관리자를 상대하는 일 등등. 그 무렵 종로에서 청량리를 거쳐 중랑교 방면으로 가는 버스 차장들은 정류장에 차가 서자 마자 내려서서는 ”청량리 중랑교 가요“를 외쳤는데, 이 소리가 그네들의 고달픈 삶에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죽는게 나요“로 들리곤 했다.
지하철 1호선 건설계획도. 서울역에서 시청을 거쳐 종각에 이르는 노선을 제외하면 1898년에 놓인 전차선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1979년 새로 지어진 – 복원이 아니다 – 보신각. 짓기는 누(樓)를 지어 놓고 이름은 그대로 각(閣)을 썼다. 보신각이나 보신루나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무슨 보신탕 전문 요리점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명실불부(名實不附)하게 만들어 놓은 데 대해서는 몰상식이라 해도 무방할 듯 하다.
도심의 교통지옥 상태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지하철 건설이 구체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의 일이었는데, 이 때 확정된 노선이 지금의 지하철 1호선이다. 지하철 1호선이 옛 전차 노선을 따른 것은 서울역과 청량리역의 기존 철도와 연계가 가능했던 데다가 – 지하철을 지상 철도와 연계시키는 일이 항용 있는 것은 아니다. 국철과 연계되는 서울 지하철은 당시까지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에 속했다 -, 종로의 가로폭이 가장 넓어 상대적으로 공사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와 더불어 도시공간, 도로에 대한 관성적 태도 – 국중(國中)의 제일도로는 종로라는 생각 -, 즉 도시의 역사성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지하철을 예정하고 전차를 철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 만들어질 지하철이 종로 전차를 대체해야 한다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종로는 전차가 놓이기 전에도 서울의 중심 도로였고, 전차가 놓인 후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서울이 조선의 수도가 된 이래 서울 사람들은 대개 종로 네거리, 보신각 앞을 서울의 공간적 중심으로 인지해 왔다.
달리는 차 안으로 승객을 밀어 넣으려 애쓰는 버스 차장. 1970년대 서울의 여성 취업인구 중에서는 공장노동자, 가정부, 버스 차장의 비중이 무척 높았는데, 이들을 비하하여 각각 공순이, 식순이, 차순이라고 불렀고, 합해서 ‘삼순이’라고도 했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모았던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에서 느닷없이 이들을 떠올린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도시 공동체는 종루(鍾樓) – 임진왜란 전에는 종각(鐘閣)이 아니라 종루(鍾樓)였다. 본래는 종로 네거리에 웅장한 누각을 세우고 종을 걸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종루가 파괴되고 종도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액운을 겪은 후 그 위계와 규모를 크게 줄여 각(閣)으로 만들었다 – 의 종소리를 같이 듣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만큼 종은 본래 도시의 공간적 중심에 걸어야 했다. 서울 정도 직후 종을 걸었던 자리는 원각사 입구, 청운교 서쪽이었는데, 태종대에 그를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그 탓에 종루의 위치는 도성의 공간적 중심에서 서쪽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아마도 창덕궁에 거처하던 이방원은 종소리의 db를 가급적 낮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새벽 단잠을 깨우는 종의 굉음을 가까이에서 듣고 싶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도성의 물리적 중심과 감성적 중심은 괴리되었다. 종로 네거리는 도성의 중심이기 때문에 종이 걸린 것이 아니라 종이 걸렸기 때문에 도성의 중심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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