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어느날 화를 버럭 냈다. “남정철이란 놈은 정말 큰 도둑놈이구나!”
남정철은 한때 평양감사를 지냈는데 고종때 왕이나 왕비의 인척이 아닌 대신들 중에서 제일 재물을 많이 끌어 모은 자로 알려져 있었다. 평안감사에 재직하면서 계속 고종에게 온갖 진기한 물건을 진상하는 바람에 고종이 “정말 충신이로다”라는 소리를 연발했고, 예쁘게 보아 중국문물을 배우러 가는 영선사로 삼아 천진으로 보냈다. 그래서 영선사로 가 있는 동안 민비의 척족이던 민영준으로 대신 감사를 시켰다. 그러자 민영준이 얼마 지나지 않아 큼직한 금송아지를 만들어 바쳤다. 고종이 얼굴이 벌개지도록 흥분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관서(關西 : 평안도)땅에 허다한 게 금인데 제놈 혼자 다 해 먹었구나!”
고종은 왕이다. 봉건왕조의 재정이 왕실의 것과 정부의 것이 분리되지 않아 왕이 국고의 돈을 끌어다 쓰기도 하지만 정부의 재정 자체가 빈약하니 재정에서 끌어대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왕실의 사치를 위해서는 딴 주머니를 찰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방관이 갖다 바치는 뇌물의 양에 따라 충성도가 측정되었고 물좋은 자리는 많이 진상하는 자에게로 돌아갔던 것이다.
고종은 현직 지방관에게서 뇌물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지방관으로 임명할 때부터 돈을 받아 챙겼다. 지방관 임명에 뇌물을 받는 것은 종친이나 처가, 사돈 할 것 없이 모두 예외가 아니었는데 갑오개혁 이후 지방관제를 개혁하면서는 더욱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관찰사는 10-20만 냥, 일등 수령은 5만냥 이상을 받았고, 벼슬 자리에 눈먼 자들이 보따리로 싸서 줄을 섰다. 이들이 지방에 내려가서 제대로 정치했을 리는 만무했고 그 밑의 이서배들도수탈을 하다 못해 관아의 재정까지 챙기는 이들에게 돌아서서는 침을 뱉었다.
1905년 일본과 맺은 을사조약에 항의해 자결한 민영환의 장인은 서상욱이었다. 민씨 척족으로 왕이나 왕비의 총애를 받던 민영환은 오랫동안 왕에게 장인을 위해 고을 원 자리를 부탁했다. 그러던 어느날 고종이 “네 장인이 아직 고을자리 하나가 없더냐?”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내가 깜박 잊고 있었구나. 광양군수 자리를 주도록 하마.” 했다. 민영환이 집에 돌아와 기쁜 얼굴로 “오늘 임금께서 장인에게 고을 자리를 하나 주셨습니다. 천은이 감읍할 뿐입니다.” 하고 어머니께 아뢰었다. 어머니가 빙긋 웃으며 하는 말. “넌 정말 둔한 바보 척족에 불과하구나. 너한테 후하게 대한 것이 네가 인척이라서겠느냐? 내가 이미 5만냥을 갖다 바쳤다.” 과거도 돈으로 해결되었다. 의주 주윤을 하던 남정익은 10만냥을 갖다 바치고 아들 남규희를 장원을 시켰고, 박영효가 이 문제로 고종에게 따지자 고종은 묵묵부답이었다.
고종이 돈을 좋아한다는 것은 젖먹이도 아는 일이었고,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고종 곁에는 대신부터 무당, 백정까지 돈을 싸들고 다니며 경쟁적으로 출입을 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이 내어놓은 돈의 양에 따라 광산의 이권, 토지이용권, 회사설립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권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광산의 이권은 돈 나올 데가 마땅찮은 당시로서는 당장 현금이 들어오는 자금원이었다. 광산이권은 갑신정변 때 김옥균 일파에게 칼을 맞아 다 죽게 된 민영익을 서양식 의술로 고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설립해 우리 근대사에서 괜찮은 외국인으로 치는 미국인 알렌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미국 쪽으로 많이 넘겨줬다. 미국인들은 그 대가로 고종에게 회사의 주식을 주었고, 고종은 이를 또 팔아치워 광산을 미국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게 해 버렸다.
고종이 말년에 가장 이뻐한 중신은 이용익이다. 걸음이 빨라 하루에 천리길을 왕복한다던 그는 임오군란 때 민비가 장호원으로 피난하자 왕과의 연락을 맡으면서 왕과 왕비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총애를 받은 이유는 무슨 벼슬자리를 시켜도 수탈해 먹은 재물을 혼자 챙기지 않고 대부분 고종에게 상납했던 탓이다. 1888년에 함경도 남병사를 시키자 광산을 개발해 금을 덩어리로 고종에게 안기고 백성의 고혈을 빨았다. 이 때문에 민란이 일어나자 고종도 어쩔 수 없이 파직시켰지만 곧 복직되어 고종의 비자금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용익은 화폐 발행도 적극 추진했다. 화폐 발행은 당연히 국가 전체의 경제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고종 연간의 화폐 주조는 대부분 재정 보완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액면가를 높임으로서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어 고종대 내내 악화 남발은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어 국가경제를 망쳤다. 이용익은 1898년께도 백동화를 남발해 물가를 폭등시키고 그 남는 이익을 왕실재정을 담당하던 내장원으로 돌렸다. 그래서 독립협회의 대표이던 정교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했다. 이용익은 차관 도입에도 적극적이어서 일본만이 아니라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에서 차관 도입을 추진했다. 차관을 들일 때는 차관제공국과 나름대로 약정서를 맺고 돈의 용도를 명시하게 된다. 대부분은 광산개발, 도로의 개발 등 개화에 필요한 사업에 쓰기로 했지만 실제의 용도는 상당 부분이 고종의 금고로 들었다. 이런 이용익을 왕이 누구보다 이뻐하지 않을 리 없었고, 대신들과 회의하는 자리에서도 손짓으로 왕을 불러 귓속말을 해대는 통에 대신들이 흥분해 군신의 예를 허무는 자라고 엄벌을 청했지만 항상 가벼운 벌같지 않은 벌만 받을 뿐 고종도 대신도 어쩌지 못했다.
이런 딴 주머니 말고도 고종이 왕으로서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자금은 얼마나 될까. 1894년의 갑오개혁이후 정부의 재정과 왕실의 재정이 분리되고 정부재정은 탁지부에서, 왕실문제는 궁내부에서 맡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궁내부 안에 내장원을 설치해 전적으로 왕의 개인자금을 담당하게 했다. 1905년에 일제의 보호국이 되면서 재정정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조사된 1904년 궁내부의 실수입은 대략 4,874,000원을 넘는 액수였다. 이 해 국가의 실수입액 11,207,591원의 약 44%를 웃돈다. 궁내부의 수입은 국고금에서 지급되는 것과 내장원에서 조달하는 금액이 있었는데 내장원에 의해 조성된 금액은 3,320,000원이었다. 이를 국고 실수입액과 다시 비교해 보면 근 30%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내장원의 돈이 워낙 많다 보니 정부가 왕실 쪽에서 돈을 빌어서 때우기도 했다. 정부 재정으로는 관료의 급료도 제대로 못주는 실정이라 1900년대에 들면 내장원의 돈을 빌어 쓰고 그 대신 내장원에서 세금을 받아 쓰도록 했다.
고종이 직접 지금하는 돈을 내탕금이라 한다. 공식적 통계로 찾을 수 있는 이 돈의 용도 중에는 왕실의 사업운영에 지출된 돈도 있다. 왕실사업으로 투자했다고 알려진 것은 대한 천일은행, 경원철도, 한미전기회사 등에 들어간 자금을 들 수 있다. 이 방면의 돈이 제대로 투입되고 근대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져왔다면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국으로 자주적 발전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지 최근 들어 몇몇 학자들은 고종의 비자금이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열심히 돈을 긁어 모은 것도 다 나라를 위해서라는 논리다. 그러나 실제로 근대화에 들어간 돈은 극히 적고 대부분이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제례비용, 궁궐이나 왕릉 개축비용 등에 들어갔을 뿐이다. 따라서 고종 미화의 논리는 일제 때문에 우리의 근대화가 가능했다거나, 온갖 폭력적 통치에는 눈을 감고 박정희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미화하는 요즘 들어 기승을 부리는 몇몇 언론이나 덜 떨어진 소설가 나부랭이의 잘못된 역사인식과 다를 바 없다.
그래도 전두환씨나 노태우씨 보다는 고종은 공식적이고, 봉건왕조의 논리로는 쓸 만한 데다가 돈을 썼다. 대통령 임기후 자신의 개인적 신변보장을 위해 야당총재에게까지 선거자금을 준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엄청나게 남은 비자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고종의 비자금 만드는 방식과 기업의 뒤통수나 치고 국방비를 떼어먹은 전두환씨나 노태우씨의 부정축재는 백년이 지난 세월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한술 더 뜨는 형편이다. 역사는 거울이다. 고종이 나라 망쳐먹은 것을 그대로 흉내내는 전두환씨나 노태우씨 같은 인물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우리의 미래도 백년 전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비자금 문제에서 정치인이라면 어느 누구하나 자유롭지 못한 현실은 우리 정치문화가 백년이 지나도 그리 나아지지 못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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