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역사인물기행] 역사상 세계 최고의 부호 그신화와 경멸의 두얼굴 "석유왕 존데이비슨 록펠러"

인물기행

by kkabiii 2017. 10. 14. 12:29

본문

세계석유시장 90%를 점유, 세계최고의부자 ,자선사업의롤모델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

(John Davison Rockefeller, 1839년~1937년)



"록펠러는 어떤 인물인가?"



존 D. 록펠러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19세기 중엽 석유업계에 발을 들인 후 막대한 확장 끝에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조직해 석유왕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그러나 이후 독점 체제에 대한 위법 판결을 받고 재계에서 은퇴해 자선가로 변신했다. 1890~92년 거금을 기부해 시카고대학을 세웠으며, 1913년 록펠러 재단을 설립해 병원, 교회, 학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자선사업을 했다. 교육ㆍ의학 연구 후원 사업에 큰 발자취를 남긴 록펠러 재단은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 1839년에 태어나 1937년 숨진 미국의 '대부호'입니다. 그의 재산이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빌 게이츠의 3배가 넘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니 당시 그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부자였습니다.
록펠러는 저자가 책의 부제를 '그 신화와 경멸의 두 얼굴'이라고 정했을 정도로 철저히 양면적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지요. 미국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운 자본가의 얼굴과 의학연구 등에 막대한 기부를 한 자선사업가의 얼굴 두가지가 그것입니다. '악마'와 '성인'이라는 말을 동시에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전자의 시각으로 본 평가는 버트런드 러셀의 다음 말이 대표적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를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둘 있는데, 바로 록펠러와 비스마르크다. 한 명은 경제에서, 또 한 명은 정치에서, 개개인의 경쟁을 통한 보편적 행복이라는 자유주의자의 꿈을 부정해버렸다. 그리고 그 꿈을 독점과 조합국가로 대체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렇게 변화해나가도록 주도한 인물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그 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든지 간에 그 부를 쌓으며 저지른 악행을 보상할 수는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후자의 시각은 윈스턴 처칠의 다음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가 존 D. 록펠러에게 최후의 평결을 내린다면, 그것은 마땅히 그가 의학 연구에 기부한 행위가 인류의 진보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것이어야 한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이 교황과 군주들의 후원에 힘입었던 만큼이나, 오늘날 과학은 관대하고 통찰력 있는 부자들에 빚지고 있다. 이러한 부자들 가운데 존 D. 록펠러는 가장 훌륭한 전형이다."
이런 논란은 잠시 접어두지요. 록펠러 같은 오래전의 인물에 대한 이런 평전에서는 몰랐던 일화들을 읽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교도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록펠러는 마치 의식을 치르듯 간소한 생활을 고수하고 엄격하게 욕구를 억제했다."
"록펠러는 백 살까지 살기 위해 생활방식을 주의 깊에 관리했고, 초 단위까지 똑같은 규칙적인 일정을 매일 충실히 따르는 것을 대단히 중요시했다."실제로 그는 담배나 술을 멀리했고 사교도 멀리했으며 백 살 가까이 살았습니다.
록펠러는 또 '지독한 구두쇠'였던 모양입니다. 저자는 그가 자선사업에서는 매우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구두쇠였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다른 갑부들이 개인지출을 감독하는 직원을 별도로 두었지만, 록펠러는 지출의 세부사항까지 스스로 관리했습니다. 여러 영지의 회계장부는 모두 그가 있는 브로드웨이 26번지로 보내졌고, 마지막 1달러까지 철저히 감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록펠러는 각 저택의 직원들에게 들어가는 1인당 음식비용까지 확인했다고 합니다. 1인당 비용이 포칸티코는 7.80달러, 포레스트힐은 6.62달러인데 비해 웨스트 54번가 4번지에서는 훨씬 높은 13.35달러가 나오자 그곳의 관리인을 호되게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들 록펠러 주니어도 비슷했나봅니다. 그도 철저한 금용주의자였지요. 그가 아버지를 본받아 지출 내용을 조그마한 수첩에 일일이 기록했다는 일화가 흥미롭습니다. 예전부터 저도 아이에게 용돈을 줄 때 꼭 지출내역을 기록한 것을 확인하고 주고 있습니다. 기록을 하지 않은 주에는 용돈을 주지 않고 있지요. 기록을 해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 옛날의 '재벌 2세'인 록펠러 주니어도 비슷한 수첩을 가지고 있었다니 흥미로왔습니다.
록펠러는 언론이 자신의 부친을 비하하는 말을 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고 하지요. 그의 부친인 윌리엄 에이버리 록펠러는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만병통치약'을 팔았던 사람이었습니다. 20세기초 미국의 언론들은 그의 부친 이야기를 기사화하면서 그를 19세기 미국의 개척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빼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을 홀리고 비행을 일삼는 떠돌이 행상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그런 '닥터 록펠러'(떠돌이 약장수)의 아들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부 재단이자 의학, 의료교육, 공공보건에서 최고의 후원단체를 만들었고, 그런 떠돌이 약상수들이 번성했던 19세기 의학의 원시적 세계에 치명타를 날렸다는 저자의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그가 평생 기부한 5억3000만 달러 가운데 4억5000만 달러가 의료사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출처:http://www.econote.co.kr/main/view_post.asp?post_seq_no=62321


"록펠러의 삶"


 록펠러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건 부모와 교회였다.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와 어머니 일

 
리자 록펠러. 어머니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가

 
장이면서도 끊임없는, 별의별 탕아 짓을 하고 다닌 인간. 아버지는 온다 간다 말 없이 가

출하기 일쑤였다. 성폭행 혐의를 받아 집안이 야반도주한 적도 있었다. 밖에서 젊은 애인

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기도 했다.
  

   1855년 록펠러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는 25살이나 어린 여자를 집에 데리

고 들어와 살았다. 한 집안에서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이 함께 사는 중혼(重婚) 가정. 악

 

행은 난잡한 사생활로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구제불능의 사기꾼이었다. 아

 

버지는 스스로를 ‘닥터’라고 칭했다. 아버지는 엉터리 약을 조제해 무지한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여 돈을 챙겼다. 속칭 돌팔이 의사였다. 아버지의 악행 일

 

지(日誌)는 끝이 없다.
   

   누구든 믿지 마라
   
   록펠러는 일찍부터 어머니의 지도감독 아래 비즈니스를 익혔다. 일곱 살 때 칠면조를 

키워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돈놀이를 해 이자 수입으로 돈을 불렸다. 사

기꾼 아버지였지만 아들에게는 경제관념을 철저하게 심어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공

짜로 돈을 주는 법이 없었다. 어린 시절 그는 사탕을 파운드 단위로 사다놓고 동생들에게

도 이윤을 남기고 팔 정도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구든 믿지 마라’는 생각을 주입시켰다. 그 결과 록펠러는 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사기를 당한 일이 없었다. 은행을 불신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놀라

운 사실은 록펠러가 그런 아버지를 한 번도 원망해본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론 처노가 쓴 



‘부의 제국 록펠러’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시킨 흥미진진한 사례가 나온다.
   
   “존이 어렸을 때 아버지 빌은 그에게 자신이 받아줄 테니 높은 의자에서 뛰어내리라고 

부추기곤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받아 안아줄 듯 팔을 내밀고 있다가 내려버렸고, 존은 그

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빌은 아들에게 다시 한번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기억하라고 

했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믿어선 안돼. 이 아빠마저도 말이야.’”
   
   

록펠러는 사업가로 대성한 뒤에도 아버지의 수많은 악행과 기행을 숨기려고 했다. 아버지



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물론 아버지의 갖은 기행을 파헤쳐낸 것은 기자들



과 전기작가들이었다.
   
   부모 다음으로 록펠러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록펠러에게 “항

상 정당한 방법으로 최대한 벌어서 베풀 수 있는 만큼 베푸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라는 개

념을 심어주었다. 부의 축적은 교회로부터 받은 신이 내린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록펠러는 성적은 보통이었다. 하지만 숫자에 밝았고 특히 암산을 잘했

다. 1855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다시 직업학교에 들어가 

상업의 기초를 배운 뒤 그는 일자리를 잡기 위해 하루 6시간씩 구직활동에 썼다. 그는 회

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매일 일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일자리를 찾는 일 말이죠. 나는 매일 그 일에 내 모

든 시간을 쏟았습니다.”
   
   1855년 9월 26일 마침내 잡화운송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월급은 1월 1일부터 받기 시작했지만 그는 취직한 날인 9월 26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는 9월 26일을 ‘일자리의 날’로 정하고 평생 생일 못지않게 중시했다. 잡화운송회사에

서 그는 몸에 밴 근검절약과 부지런함으로 돈을 모았다. 이렇게 8년이 지난 뒤인 1863년 

그는 목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돈으로 클리블랜드 정유공장에 공동 투자했다. 이 시점은 


자동차시대가 본격 개막되기 훨씬 전. 보통 사람은 석유가 ‘검은 황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70년 스탠더드오일을 세웠고, 1872년 클리블랜드에 있는 경쟁사 26개 중 





22개를 6주 만에 흡수합병했다.



   자기절제의 표본

1877년 서른여덟 살이 되었을 때 록펠러는 미국 정유산업의 90%, 원유 채굴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그는 사업 확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편법과 불법은 밥 먹

듯 해치웠다. 정치인과 언론인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당연시했고 경쟁자를 파멸시키기 위

해 스파이를 예사로 고용하기도 했다. 경쟁사의 파이프라인 건설을 방해하기 위해 파이프

라인 통과 가능한 지역의 토지를 사들인 뒤 매각하지 않고 버텼다. 이른바 ‘알박기’였다. 

노조탄압도 예사로 자행했다. 1914년 러들러학살사건이 발생했다. 록펠러 소유의 탄광

에서 광부 2만여명이 파업을 일으켰고 진압 과정에서 20여명이 사망한 게 러들러학살사

건이다. 경쟁자와 노동자에게 록펠러는 탐욕스러운 악덕 기업가,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악독한 기업가였다.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록펠러는 마르크스가 말한 끊임없는 착

취로 노동자 계급의 피를 빨아먹어 종국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계기를 제공하는, 자본주

의를 망하게 하는 악덕 기업가이자 최악의 범죄자였다. 록펠러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자

신의 행동을 ‘정당한 방법’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록펠러는 자신이 원한을 산 사람이 많

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침대 곁에 항상 총을 두고 잠을 잤다. 물론 이것이 그가 악행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후회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1913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 그

의 재산은 10억달러였다.돈을 쓸어담는 데는 절제를 몰랐던 록펠러였지만 생활에서는 자


기 절제의 표본이었다. 그는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 늘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매일



매일의 개인 회계 장부를 작성했다. 1센트의 출납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회계장부가 그



의 일기였다. 그 많은 



부를 갖고도 아내 외에는 다른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아내 로라 스펠먼 역시 남편과 모든 



게 비슷했다. 부부는 술이 나오는 파티나 행사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수입의 10분의 1을 


교회에 헌금한다는 십일조를 평생토록 지켰다.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

   

   미국은 언론자유의 나라. 록펠러의 마각을 폭로한 것은 아이다 타벨(1857~1944)이

라는 기자였다. 아이다 타벨은 스탠더드석유회사가 저지른 갖가지 만행을 심층 취재해 1

902~1905년 잡지 ‘매클루어’에 ‘스탠더드석유회사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19회 장기연

재했다. 탐사보도의 효시로 불리는 이 보도로 미국 사회는 거부 록펠러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스크루지보다도 더 악독하게 축재를 하던 록펠러. 그런 그가 자선에 눈을 뜬 것은 55세 


되던 1894년이었다. 의사로부터 1년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최종 검


진을 위해 병원에 들어섰다. 침울한 상태에서 병원 로비에 들어섰을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건강하던 평소 같았으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액자의 글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이 말이 얼음장 같았던 그의 가슴을 녹였다. 록펠러는 마음속으로 전율을 느꼈고, 어느

덧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록펠러는 병원 원무과에서 입

원비 문제로 소란이 벌어진 것을 목격했다. 돈이 없는 어느 어머니가 어린 딸을 입원시켜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입원비를 대납하게 했다. 물론 자

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이 소녀가 목숨을 건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그때의 심정을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
  
이날 이후 록펠러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새로 태어나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비로

소 나눔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 1897년부터 그의 자선은 본격화된다. 하지만 그의 악

행을 더 많은 기간 지켜본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록펠러는 자선사업을 지속적으로 체계화할 생각으로 1913년 록펠러재단을 세웠다. 재

단 헌장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널리 세계에서 인간의 안녕을 도모한다

(Promote the well-being of mankind throughout the world)’, 록펠러 센터 1층 로비 벽면에는 헌장 내용이 붙어 있다.
   
   

   미 최고의 명문가문으로




   ▲ 1937년 5월 존 록펠러의 장례식이 끝난 뒤 찍은 록펠러가 2·3세들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존 록펠러 2세, 그의 5남 데이비드, 차남 넬슨, 4남 윈스롭, 3남 로렌스.




록펠러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 1919)와 함께 ‘과학적 기부’라는 개념을 만든 



선구자로 평가된다. 록펠러는 고아원, 학교, 병원 등에 후원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선사업에 기업운영방식을 도입했고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



는 1889년에 시카고대를 설립하고, 1901년에 록펠러대를 세웠다. 시카고대와 록펠러대



는 지금까지 각각 87명, 2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록펠러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스펠맨대학을 후원했다. 스펠맨대학은 남북전쟁 



후 해방된 노예와 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된 학교였다. 비록 록펠러 자신이 노예제



도가 있던 시절 젊은날을 보냈지만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노예에 대

한 연민이 이 학교를 후원하게 만들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휘트니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과 함께 뉴욕의 자랑이다. 

그런데 뉴욕현대미술관이 1927년 록펠러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백남준이 존 케이지, 오노 요코 등과 함께 1960년대 후반과 1970

년대 초 전위예술운동의 하나인 플럭서스(Fluxus)운동을 할 때의 포스터들을 모두 소장

하고 있는 곳이 뉴욕현대미술관이다.
   
   록펠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자기 절제의 대명사였다.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고 골프를 

하지 않다가 60세에 처음으로 손을 댔다. 이후 골프에 빠져 하루 6시간 이상 골프를 즐겼

다.
   
   록펠러의 또 다른 행운은 자식을 잘 키웠다는 점이다. 록펠러 가문은 케네디 가문과 함

께 미국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꼽힌다. 록펠러는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경제 관념 교육

을 철저하게 했다. 용돈은 반드시 심부름이나 집안일을 해야만 줬다. 유명한 일화 한 토

막. 파리 한 마리 잡으면 3센트, 음악 연습을 하면 1시간당 5센트, 연필을 깎으면 10센트 

하는 식이었다.
   
이런 결과 외아들 록펠러 2세(1874~1960)는 아버지보다 더한 금욕주의자가 되었

다. 그는 평생을 아버지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일에 쏟아부었다. 당대 최고의 홍보전문가

를 동원해 아버지 이미지를 바꾸는 작업에 돈을 쏟아붓기도 했다.
   
   록펠러 2세는 5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록펠러 가문을 발판 삼아 자기 분야에서 성

공했다. 차남 넬슨(1908~1978)은 대통령 보좌관, 뉴욕주지사, 부통령을 역임하며 한

때 대통령을 꿈꾸기도 했다. 3남 로렌스(96)는 항공업과 원자력사업에 뛰어들어 초기 환

경운동의 중심적 인물이 됐다. 4남 윈스롭(1912~1973)은 아칸소주지사를 역임했고, 

막내 데이비드(91)는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지배주주가 된다.
   
   지금 ‘톱 오브 더 록’을 찾는 세대는 록펠러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잘 모른다. 록펠러의 

삶은 총체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록펠러는 98세로 숨을 거두기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다.”






[출처] 록펠러 [주간조선]|작성자기절제의 표본 가을하늘


내용출처:http://blog.naver.com/crtiger7/10156277803



"록펠러 일화 모음"


"백만장자 록펠러의 비밀"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된 인물이다. 또한 43세에 미국 최대의 부자 가 되고 53세에

는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 행복하지 않았다. 55세가 되었을 때 불치병으로 

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기 때문이다.그러던 중, 마지막 검진

을 위해 병원에 갔던 록펠러에게 로비에 걸린 액자

 의 글이 눈에 들어 왔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글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속

에는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짧은 한 마디 문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렇게 병원 로비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디선가 소

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병원비 문제로 환자의 가족과 병원 

측이 다투는 소리였다. 환자의 가족은 너무 가난해서 병원비를 낼 수 있는 형편이 되질 않

았고, 그런 환자를 입원시킬 수 없다는 병원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환자의 어

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병원 관계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초라한 안색을 하고 있는 소녀가 한쪽에 앉아서 조용히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이 광경을 
목격한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그 환자의 병원비를 대신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누가 

지불했는지에 대한 것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얼마가 지난 뒤, 록펠러는 병원에 다시 찾

아갔을 때 소녀의 회복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본 록펠러는 나중에 자신의 자서전에 

이 순간을 그의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이후 록펠러의 삶은 완

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정말 뜻밖에도 암투병에 시달렸던 건강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98세까지 행복한 삶을 살며 록펠러 재단을 통해 나눔을 페푸는 삶을 살았다."살

면서 이처럼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을 미쳐 몰랐습니다. 내 인생의 55년은 항상 쫓기듯 살

았지만, 나머지 43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였습니다."죤 록펠러는 아들에게 자신이 경험

한 나눔의 힘에 관한 짧은 글을 남겼다."나는 아주 오래 전, 돈을 남에게 나눠주기 시작한 

후부터 재산이 점점 늘어나는 선물을 받게 되었다."실제로 그는 세상을 따날 때까지 5억 5

천만 달라나 되는 돈을 남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남에게 돈을 나눠줄수록 더 많은 재

산을 모을 수 있었다.어떤 사람들은 그가 이미지 관리를 위한 홍보 전략으로 몇푼 안 되는 

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록펠러의 PR 담당자 말에 의하면 

그는 수십년 동안 자신의 의지로 사람들에게 돈을 베풀었다고 한다.
(죠 바테일 지음, 최종옥 옮김의 '함께 사는 세상의 시작 <나눔>에서)


"값싼 호텔을 찾는 석유왕"




출처:http://1992.co.kr/bbs/board.php?bo_table=051_05&wr_id=16


"록펠러의 기부정신"


록펠러는 33살 때 이미 최초의 백만 달러를 저축하고 있었습니다. 43세 때에는 세계 최


대의 독점 사업 스탠다아드 석유 회사를 설립지만 53세 고민과 극도의 긴장된 생활로 그

는 산송장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당시 세계 제일의 부호였으나, 그의 1주일 동안의 식비는 2달러도 들지 않았습니다. 
소량의 산화 밀크와 2-3개의 크래커가 의사가 허락한 음식물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 59세로 죽지 않고 98세까지 장수를 누렸던 것은 가장 비싼 의사의 치료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전의 그는 좋은 돈벌이가 있다는 뉴스를 들을 때 이외에는 결코 웃는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손해를 입었다고 하면 곧 앓아 누웠습니다. 그는 1년에 5십만 
달러 이상의 큰 거래를 하고 있었으면서도 불과 150달러의 보험금을 손해 봤다고 생병이 
나서 침상에 눕기까지 했습니다. 

그에게는 운동이나 오락에 허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다만 돈벌이와 주일 학교에서 봉사
하는 시간을 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밤마다 침상에 누워서 내 성공이 다만 일시적
인 것이 아닌가 불안해했으며 고용인이나 동료들이 외부 사람들에게 사업상의 비밀을 누
설하지 않을까 불안해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전혀 신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의사들은 돈이냐, 생명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고 그는 은퇴하였습니
다. 운동을 시작하고 꽃을 가꾸고 이웃 사람들과 잡담을 하며 카드놀이도 하고 노래도 하
였습니다. 그가 한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다른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애 처음으로 얼마만큼 돈을 벌 수 있는가의 생각을 그치고 돈이 인간의 행복에 얼마
만큼 소요되는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록펠러는 그 막대한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엔 그것도 쉬
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교회에 자신이 기부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 전국에서는 부
정한 돈에 손대지 말라는 부르짖음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주었습니다. 

록펠러는 세계 방방곡곡에 이상으로 불타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가지가지의 운동이 자
금 결핍으로 인하여 중단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사업을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 인
도주의 개척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의 재산의 원호에 의하여 발견된 페니실린을 비롯하여 많은 기적적 발
견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척수염이니, 말라리아니, 결핵, 유행성 감기, 디프테리아 등 
많은 질병 치료법의 진보에 대하여 그에게 힘입은 바는 실로 큰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재산을 기부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록펠러는 행
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아주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록펠러 와 검은물"



석유왕 록펠러에게 큰 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원금을 모두 날렸다죠.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구
요.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떠올렸고,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
부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를 했답니다. 그때 마
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는데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다고 하는군요.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수군거렸구요. 그때 갑자기 황금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고, 그것이 바로 석유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 직전의 록펠러는 유전
을 발견해 일약 거부가 된 것이라는 일화가 있습니다.


"록펠러의 회계장부"

그의 회계장부는 그의 인생 그 자체였다. 록펠러처럼 성공하고 싶다면 그의 ‘회계장부 정

신’을 일단 배워야 한다. 록펠러 가문의 평전인 <록펠러 가의 사람들>에 이런 문장이 나

온다. “그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장부를 기록했으며, 한 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수입과 지

출금, 저축과 투자금, 그리고 사업과 자선금의 내역을 작성해 나갔다. 매주 그는 싸구려 

하숙집의 집세로 1달러를 지불하는 것 외에도 소액기부 모임에 75센트를, 그리고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주일학교에 5센트, 빈민구제 활동에 10센트, 해외선교 활동에 10

센트를 헌금했다.” 그는 4달러 주급 시절부터 기독교 정신의 핵심인 십일조, 즉 자신의 수

입의 10%를 헌금으로 평생을 낸 독실한 신자였다. 또한 미국 사회에 엄청난 기부금을 선

사한 자선사업가이기도 했다

내용출처:http://1992.co.kr/bbs/board.php?bo_table=051_05&wr_id=16


"존D 록펠러 주니어 의 흥미로운일화"


대학에서 록펠러 주니어는 절약가로 유명했다. 친구들이 저마다 관련 일화를 하나씩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가 마주 달라붙은 2센트짜리 우표 두 장을 물에 적셔 떼어낸 일이나, 바지를 직접 다려 입고 손수 단추를 달았다는 것, 그릇 닦는 행주를 꿰매어 수선했던 일 등을 기억했다.또한, 친구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한 습관이었지만 그는 아버지를 본받아 조그만 수첩에 지출 내용을 일일히 기록했다. 데이트를 위해 꽃다발을 살 때도, 교회에 헌금을 낼 때도, 가난한 사람에게 연필 한 자루를 사줄 때도 모든 지출을 센트 단위까지 꼼꼼히적어두었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원하는 만큼 돈을 받지만, 대신 동전 한

닢까지 정확한 사용처를 대야한다고 하더군요."


또 한 친구는 이렇게 회상했다. "특히 프로비던스에 사는 여학생들 사이에 굉장한 
 


농담거리였지요. 존 D. 록펠러 주니어에게 음료수 한 잔을 사달라고 해서 얻어먹고


는 앉은 자리에서 수첩에 지출 내역을 써넣게 했다며 웃어대곤 했습니다.




"록펠러 명언 모음"

"나는 절약이야 말로 계획적인 삶의 필수 요소라고 믿는다"
-존 D.록펠러-



 "모든권리에는 책임이 
모든기회에는 의무가
모든소유에는 책무가따른다.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
-존 D.록펠러-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그렇다면 불만은 발전의 아버지다."

-데이비드록펠러-



"당신의 재산에대해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딱한가지다.
 당신은 그 재산으로 어떤일을 할것인가?"

-존 D. 록펠러-


"성공의 비밀은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하는것이다"

-존 D.록펠러-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즐거워하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존 D. 록펠러-

신기료 장수 세 명이 제갈량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나. 100명이 약간의 노력을 기울여도 내가 전력을 다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존 D. 록펠러-


훌륭한 리더십은 평범한 이들에게 뛰어난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존 D.록펠러-


친한 이들끼리 사업을 하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다. 사업을 하며 쌓아올린 우정이라는 게 때로는 더 낫다. 



-존 D. 록펠러-



돈을 버는 방법은 명확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곡소리가 울려 퍼질 때 승부수를 던지라는 것이다. 



-존 D. 록펠러-



단지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시작하는 이들은 성공하기 어렵다. 더 큰 야망을 지녀라. 



-존 D. 록펠러-



내가바라는것을  해낼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모든것을 맡겨라.

-존 D. 록펠러-

나는 그저 나보다 머리좋은사람들을 채용했을 뿐입니다.
-존 D .록펠러-

성공하려면 귀는열고 입은 닫아라
-존 D.록펠러-


-록펠러 저서-



부의제국 록펠러 

론처노의 의 록펠러 전기 

I, II 권 

이 책은 록펠러의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며, 복잡한 한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아버지와의 애증관계, 형제간의 갈등, 그의 자식들이 겪은 정신적인 문제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록펠러가의 스캔들과 어두운 비밀들도 파헤치고 있다. 또한 록펠러의 일대기를 통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미국 사회를 함께 보여준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