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공무원의 연봉, 얼마나 되었을까?
요즘 공무원은 꽤 인기있는 직업이다. 안정적인 연봉과 근무여건이 보장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어땠을까? 고려 사람들도 관리가 되는 것을 선호했다. 특히 고위 관료는 누구나 선망하던 최고의 직업이었다. 그렇다면 고려시기 관료들의 수입은 얼마나 되었으며, 연봉인 녹봉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직급에 따라서는 얼마나 차이가 났으며 연봉은 어떻게 썼을까?
고려 숙종때 사람 정목은 「정과정곡」으로 잘 알려진 정서의 할아버지다. 그런데 그가 녹봉을 받는 날이면 아마 동네가 떠들썩했을 것 같다. 정목의 묘지명에는 그가 녹봉을 받으면 그 혜택이 내외 친인척 심지어는 마을의 천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고 했기 때문이다. 병부, 예부의 시랑을 역임했으므로 당시 그의 녹봉은 일 년에 쌀, 보리, 조등으로 200석 정도되었을 것이다. 이 중 35석을 그는 일가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사진 1> 부산 수영구 망미동 정과정유적지(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
또 우왕때 간신 임견미 열전에는, 마침 녹봉을 지급할 때가 되자 왕이 명하기를,
“재상들은 이미 부유하니 녹봉을 주지 않아도 좋다. 먼저 군졸중에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지급하라.”
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이렇게 고려시대에는 고위 관리가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 주거나 혹는 부자라고 녹봉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런 사례가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아무리 부자라도 공무원이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월급을 나누어 주거나, 국가에서 의도적으로 연봉을 주지 않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고려에서 녹봉제도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1076년(문종 30년)이며, 그 후 인종조에 다시 개혁되었다. 당시 녹봉을 받는 주요 대상은 왕비를 비롯하여 후비들과 공주, 왕의 친족인 종실, 문무반원등이었다.
또 70세가 되어 정년을 한 3품 이상의 퇴직 관료들은 치사록을 받았다. 일종의 연금인 셈이다. 그 외 여러 관청의 말단 이속과 공장(수공업자)들은 별사라고 하는 녹봉을 받았으며, 성황신도 녹봉을 받았다. 그러나 녹봉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문무반 관직자들에게 주는 문무반록이었다.
고려시대의 문무반록은 요즘 호봉제처럼 근무연한에 따른 규정은 없었고, 대체로 관직의 고하에 따라 47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급 방식과 내용은 쌀, 보리, 조등을 일 년에 2회로 나누어 매년 정월 7일과 7월 7일에 지급하도록 하였는데,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다.
액수는 최고 400석에서 10석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따라 지급되었으므로 최고와 최하의 연봉 차이는 40배나 되었다. 400석을 받는 관직자는 문하시중, 중서령, 상서령등 최고위 관직자였는데, 당시 농민 가호가 평균 1결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고 여기서 대략 20석 미만의 소득을 올렸다고 볼 때, 최고위 관직자는 일반 가호 소득의 20배가 넘는 연봉을 받았던 셈이다.
그런데 고려시기에 관료들은 녹봉만 받았던 것이 아니다. 사실상 관직자들에게 보다 경제적 의미가 큰 것은 전시과라는 토지였다. 관직자가 되면 국가에서는 직위에 따라 차등을 두어 토지를 지급하였다. 전체가 18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등급 최고액은 전지 100결, 시지 50결이었고 최하 18등급은 전지 17결이었다.
그러나 토지의 소유권을 준 것은 아니었고 수확의 1/10을 조로 거둘 수 있는 권한 즉 수조권을 준 것이었다. 최고액을 받던 문하시중의 경우를 예로 들면 전지 100결, 시지 50결을 받았으므로, 여기서 나오는 수조액은 녹봉에는 좀 못 미치는 액수였다. 그러나 수조권은 평생 보장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현직에 있을 동안에만 지급되던 녹봉에 비해 경제적 의미는 오히려 큰 것이었다.
게다가 고위 관직자들은 이미 부유층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부유한 고위 관직자의 경우 녹봉의 경제적인 의미는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위의 보이는 정목의 사례나 임견미 열전에 나오는 기록들은 아마도 이러한 상황에서 가능했던 현상이 아니었을까? 이들에게는 관직으로 인한 경제적 실리보다는 최고권력에 접근해서 신분적 지위를 높이는 것이 보다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신분사회인 고려시기에 관리가 되는 것은 곧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었으니까.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이런 부유한 관리가 많았다고 보긴 어렵다. 당시 관리의 정원은 대략 4,400 여명 정도 되었는데, 그 중 3000명 가까이는 하위직인 8,9품이었다. 그리고 최하위 관직자의 녹봉은 10석으로 평균 농가 소득의 절반밖에 안 되는 박봉이었다. 그러므로 특히 전시과가 무너지는 고려후기에는 일부 부유층을 제외한 일반 관리들이 녹봉만으로 살기는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사』 염흥방 열전에 보면, 왕이 국학을 중영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문신들에게 관품에 따라 베를 내라고 하였다. 그때 종 6품 벼슬인 전교랑 윤상발은 옷을 팔아서 베 50단을 마련해 냈다. 그러자 염흥방이 베를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윤상발은 녹봉을 받아도 끼니를 잇기가 힘든 형편인데, 옷을 팔아 비용을 마련했으니 그대들이 윤상발 보다 적게 낼 수 있겠느냐.”
고 하니 순식간에 사람들이 바친 베가 10,000단에 이르렀다고 한다. 6품 벼슬의 윤상발이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던 것이다. 심지어 충선왕때는 재상을 지냈던 민지도 집이 가난해서 왕이 쌀 100석을 하사했다고 한다. 충렬왕때 국학대사성을 지냈던 윤해도 항상 헤진 옷과 뚫어진 신발을 신고 다닐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렇게 고려후기에는 고위 관리를 지냈던 사람들조차도 녹봉만으로 안정된 경제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진 2> 최석: 순천팔마비
따라서 관리들에게 부정은 피해 가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충렬왕때 승평부 태수로 나갔던 최석이 이임시에 관행으로 받던 말을 돌려 보냈다고 하여 팔마비를 세워 칭찬한 것은 그만큼 청백리를 찾기가 어려웠던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예나 지금이나 청백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