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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등장하는 연좌인의 모습 : 조선의 연좌제

지나간 것은 역사

by kkabiii 2017. 10. 2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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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적 집안의 며느리와는 이혼하는 것이 상책?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연좌 범위가 법전에 규정되어 있어 일정 범위를 벗어나는 친인척들이 과도하게 연좌되어 처벌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반드시 규정대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 역사를 돌아볼 때 법외로 연좌제가 남용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굳이 여러 가지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 윤씨의 폐비에 연루된 자들에게 일대 반격을 가한 사건인 갑자사화 때의 사례에서 이 점이 확인된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5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연산군은 이극균(李克均), 이세좌(李世佐), 윤필상(尹弼商), 성준(成俊), 한치형(韓致亨), 어세겸(魚世謙) 등을 처형하면서 이들의 동성(同姓) 8촌, 이성(異姓) 4촌의 자녀들은 한 명도 서울에 남겨두지 말고 모두 지방으로 귀양보낼 것을 지시하고 있다. 연산군 스스로 이런 조치가 법에 정한 연좌 범위를 넘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하였다.


<그림1> 연산군 묘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연산군 묘역. 사진 우측이 부인 거창신씨의 묘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역적 집안의 딸과 결혼한 사위가 화를 입는 경우인데, 원래 규정상 연좌제가 사위나 사위 집안에까지 미쳐서는 안되나, 현실은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았다. 연산군보다 앞선 단종 1년에 김종서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파직당하자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징옥(李澄玉)의 경우 세조 정권은 그의 사위까지도 변경 지역에 안치(安置)시켰다.

또한 사위와 함께 출가녀, 즉 시집간 딸에 대해서도 연좌제를 적용할 때 논란이 되곤 하였다. 출가하여 이미 남의 집에 며느리가 된 딸의 경우 연좌에서 제외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선조대의 기축옥사(1589), 광해군 5년의 계축옥사(1613) 때 출가녀까지 유배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현종은 법에 정한대로 출가한 딸은 연좌시키지 말 것을 재천명하였으나, 이후에도 출가녀를 연좌시킬지 말지에 관한 논란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숙종대에 오면 역적 집안의 딸과 결혼한 사위 집안에서 자신들까지 화를 입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해당 집안에서 온 며느리와 이혼하는 것이 당시 공공연한 일이 되었다고 한다. 즉, 숙종 38년(1712) 4월 당시 예조(禮曹)에서는 국왕 숙종에게 “역가(逆家)의 친딸과 이혼하는 일은 비록 법 밖이라 하지만, 이미 전해 오는 관례가 되어 쉽사리 변경하거나 고칠 수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말하자면 연좌의 검은 망토가 종종 사위 집안까지 둘러싸고 있었다고나 할까?

2. 화(禍)가 뱃속 손자에까지 미칠 뻔 한 사연

한편 연좌제와 관련하여 세조대 박팽년(朴彭年) 집안의 흥미로운 이야기도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은 세조 2년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옥중에서 고문으로 죽게 되었는데, 세조는 자결한 유성원(柳誠源) 등과 함께 박팽년의 시체를 수레에 묶어 거열(車裂)에 처하고 찢겨진 몸을 팔도에 전시하도록 하였다. 이 때 박팽년 집안은 아버지와 아우 넷, 아들 박헌(朴憲)·박순(朴珣)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림2> 박팽년 영정  충남대 윤여환교수가 제작한 국가표준 박팽년 영정(출처 : 연합뉴스)

불행은 이 뿐만이 아니어서 집안 전 재산은 몰수되었고 어미와 처첩, 아들의 처첩 등은 노비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박팽년이 죽을 당시 아들 박순의 아내 이씨는 임신 중이었는데, 고향인 대구로 귀양을 가서 관비(官婢)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만에 하나 그녀가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고 명령하였는데, 마침내 아들을 낳게 되어 죽게 될 판국이었다.

『대명률』에는 분명 15세 이하의 아들은 연좌 처형을 면할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지만, 박팽년 등 사육신 집안에는 법의 규정을 넘어서서 뱃속의 손자까지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박씨 집안의 종 가운데 비슷한 시기에 낳은 딸이 있어 서로 자식을 바꾸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화를 면한 박팽년의 손자는 성종 때 자수하여 사면을 받았으니 그가 바로 박일산(朴壹珊)이며, 그가 정착한 마을이 대구 달성 하빈면의 묘골이다.
이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자칫 태어나자 마자 죽을 뻔한 박일산이 구사일생함으로써 그는 묘골의 순천박씨 입향조가 되었다고 하니, 지금도 이곳에 순천박씨 집성촌을 알리는 건물과 유적이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그림3> 태고정  대구 달성 하빈면의 박팽년 직계후손들이 살던 묘골 마을 소재.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건립한 종택의 정자 건물이다.

3. 전가사변(全家徙邊)은 폐지되었지만…

앞서 열거한 사례들에서 보듯이 취약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반대 정치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국왕에 의해 일부 자의적으로 연좌제가 종종 남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연좌 처벌이 늘상 국왕 입맛대로 자의적으로 집행되었던 것은 아니며, 연좌 적용을 신중히 하고 완화시키려는 흐름도 분명 존재했음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연좌제 제한을 위한 조치, 규정이 그것이다.

특히 모반대역과 같은 대역죄인이 아닌 경우에는 가능한 연좌 처벌을 제한하고자 하였는데, 왕릉(王陵)에 불을 낸 경우가 대표적이다. 성종 5년(1474) 왕릉의 하나인 지릉(智陵)을 불태운 중 홍수(洪守)란 자를 처벌할 때 형조에서는 율문에 의거하여 본인은 능지처사(凌遲處死)에 처하고 가족들도 연좌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성종은 연좌만은 면제해주었다. 이같은 조치는 숙종 30년(1704)에도 확인되는데, 효릉(孝陵)에 불을 낸 능의 노복(奴僕) 주명철(朱命哲)의 경우도 가족 연좌는 면해주었다.

한편, 어린아이에 대한 연좌 면제 조치 등도 강조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인조는 3세 이하의 어린아이의 경우 연좌 대상에서 면제해줄 것을 정식화하였는데, 그것이 『인조실록』 인조 3년 1월 20일자 기사에서 확인된다.

무엇보다도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연좌제 완화의 흐름으로 보아도 좋을 뚜렷한 조치가 있었으니, 전가사변(全家徙邊) 처벌이 영구히 폐지된 사실이 그것이다. 전가사변은 말 그대로 ‘전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는’ 형벌로서, 당초 변경 지역에 대한사민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즉, 사람들이 거처하고자 하지 않는 함경도 등 북방지역의 거주인 수를 늘리기 위해 범죄인과 그 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형벌이었다.

<그림4> 『대전회통』 형전 「추단(推斷)」조  전가사변(全家徙邊) 형률의 폐지 연혁이 나온다. 이 조문은 『속대전』에 처음 실렸다가 『대전회통』에 다시 실린 것이다.

  전가사변은 조선초기부터 시행이 되었는데 상중(喪中)에 간음한 죄인이라던가 업무 처리 과정에서 농간을 부린 간악한 향리인 원악향리(元惡鄕吏) 등 양반 사족들보다는 평천민, 향리 등이 주로 대상이었다. 전가사변 시행과정에서 전가사변의 죄목(罪目)이 지나치게 번다해지고 조선후기 전가사변에 처해지는 사례도 크게 늘어났다.
전가사변 형벌은 북방 먼 지역으로 죄인을 유폐시키는 유배형의 성격을 지니면서, 동시에 죄인의 가족들까지 동일한 처벌을 받는다는 점에서 연좌형의 성격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점차 전가사변이 갖는 연좌형의 부당함이 인식되면서 숙종대에 관련 법조문을 개정하였고, 마침내 영조는 전가사변 형률 자체를 완전히 폐지하였다.

영조는 형률 폐지 직후 “이번 전사사변률을 제거한 밤에는 내가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이룰 수 있겠다”며 좋아했을 정도인데, 이제 전가사변은 범죄자 자신만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으로 처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림5> 육상궁  현재 청와대 내부에 있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의 현판. 출신상의 약점을 지닌 영조는 재위 기간중 왕권 강화와 어머니 추숭사업을 벌인다.

그런데 영조가 전가사변율의 완전한 폐지를 통한 연좌제 완화 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이와는 달리 역모를 꾀한 정치범에 대한 연좌는 다른 국왕과 마찬가지로 용서가 없었고 때론 더 가혹하게 연좌율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그 예를 두 가지만 들면 이렇다.

첫째,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여 이를 진압, 처벌하는 과정에서 모반대역 죄인 처벌 관련 특례를 만들었다. 즉 같은 모반대역이라 할지라도 거병한 역괴(逆魁)의 경우에는 그 형제, 처첩까지도 연좌하여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그것이다. 원래 『대명률』에는 모반대역을 범한 자의 16세 이상 부자(父子)만을 사형에 처하게 하였으나, 이제 병력을 일으켜 쿠데타를 일으킨 죄수의 경우 그의 부자뿐 아니라 형제, 처첩까지도 극형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둘째, 1755년 을해옥사가 터지자 역율(逆律)을 추시(追施)하기에 이르렀다. 영조 즉위 전반기의 대역죄인의 가족들 중 연좌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던 자들이 이 때 와서 다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요컨대 일반적인 연좌제의 완화 흐름에도 불구하고, 대역죄인과 그 가족에 가해졌던 권력에 의한 가혹한 연좌의 횡포는 탕평군주 치하에서도 완전히 부정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4. 기록 속 연좌인의 불우한 삶
그럼 실제 연좌되어 노비가 되거나 유배간 사람들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앞서 보았듯이 대역죄인의 아버지와 아들은 대역죄인과 함께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던 반면, 어머니, 처첩 등 가족, 일족들의 경우 남의 노비가 되거나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평생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따라서 겨우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이들 연좌인들의 삶은 팍팍할 수밖에 없었음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림6> 의금부노정기  유배지까지의 노정, 거리 등을 기록한 책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 규 19531)

  사실 연좌인들의 삶과 관련한 기록이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단서는 찾을 수 있다. 먼저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언급에서 이들의 전체적인 처지를 엿볼 수 있다.

19세기에 정약용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이른바 ‘역적’들 중에는 간혹 당쟁으로 인해 억울하게 처벌받은 경우도 있다고 전제하고, 설사 역모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자식과 형제들의 경우 아무 죄도 없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당시 세태가 연좌되어 유배온 자들에 대한 능멸과 학대가 매우 심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그는 부녀자들이 하루아침에 남의 집 비(婢)가 되면 그 고통이 클 것임에도 불구하고, 못된 수령들의 경우 으레 관청에 불러들여 점고(點考)를 받게 하고 미모가 어떤지 엿보기까지 한다고 꼬집고 있다.

정약용의 언급에 등장하는 부녀자의 연좌 사례로 경상도 단성현의 우계임(禹桂壬)과 세 자녀를 들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조선후기 경상도 단성 지역의 호적대장에 이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들은 1728년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이만동(李萬東)의 처자식들이다.
이들의 사정을 좀더 살펴보자. 이만동은 무신난 당시 진잠현감(鎭岑縣監)으로 재직 중에 청주의 적병(賊兵)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서울로 압송되어 국청(鞫廳)에서 형장을 맞고 사망하였다. 이 때 부인 우계임과 어린 세 자녀는 연좌되어 이만동 사망 직후 단성으로 정배된 것으로 보이는데, 우계임은 이곳에서 관비(官婢)로 등재되었다.

1729년부터 1762년까지 단성호적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에 대해 호적대장은 우리에게 더 이상 알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우계임이 하루아침에 관비로 전락하여 낯선 타향에서 어린 세 자녀를 키우며 사는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 없었을 것이다.


<그림7> 연좌안  조선후기 연좌된 죄인들의 내역을 기록해 놓은 책자. 장서각 소장(도서번호 : K2-3440)

한편, 규장각과 장서각에 남아있는 『연좌안』에는 영조대부터 고종대까지 연좌된 죄인의 명단과 처벌 내용, 사망 연대 등이 적혀 있어 이 시기 연좌인들의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연좌안』 속 사례 가운데 전패작변(殿牌作變) 죄인 최하징(崔夏徵) 가족들의 경우는 비교적 다른 연좌인에 비해 운이 좋은 경우이다. 1736년 충원현(忠原縣)의 창리(倉吏)였던 그는 관곡을 횡령하고는 발각되지 않으려고 수령 축출 계획을 세워 몰래 객사의 전패(殿牌)를 가져다가 돼지 우리에 던져 버렸다가 참형에 처해졌다.

『연좌안』에 따르면 이 일로 인해 그의 어머니, 형, 동생, 처 등 모두 4인이 경상도 함창현의 노비가 되었고, 조카 1명도 같은 함창현에 안치(安置)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가족 모두 같은 고을로 보내졌다는 점, 게다가 이듬해 형과 조카는 최하징의 처 정금(丁今)의 격쟁(擊錚)을 통해 석방되었다는 점에서 비교적 가벼운 연좌에 속한다.


<그림8> 직산현 관아  조선시대 관아의 객사(客舍)에는 왕의 초상을 대신하여 ‘전(殿)’이라 새긴 전패를 봉안하였다. 이를 훼손하거나 모독하는 경우 왕에 대한 불경죄를 다스렸다.

반면 상당수 연좌인들의 경우 가족들이 여러 고을로 나누어 보내졌으며, 정배된 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단명하는 경우도 많았다. 1801년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가족들의 경우 어머니, 처, 아들 세 명이 연좌되었는데, 어머니는 경상도 거제도, 처는 제주도 대정현, 2세에 불과한 아들은 전라도 추자도에 각각 노비로 떨어져 생활해야 했다.

순조 때 난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 집안은 병력을 동원한 역괴(逆魁)의 일족이라 해서 처벌의 강도가 훨씬 더 컸다. 난이 평정된 1812년에 홍경래 뿐 아니라 처와 동생 홍정래(洪鼎來) 또한 연좌되어 목이 떨어져 나갔음은 물론, 11살의 어린 아들과 조카 셋 등도 모두 제주도, 흑산도, 고금도, 추자도 등 네 개의 섬으로 각각 쫓겨났다. 게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이들 네 명 중 고금도에 안치된 조카 한 명을 빼 나머지 세 명은 이 해 6월에 모두 사망하는 것으로 『연좌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림9> 홍경래 연좌 기록  『연좌안』에 실린 홍경래 가족들의 연좌 내역. 그림의 우측면에 보인다.

  앞서 제시한 것들은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른바 ‘역적’의 가족들 중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조차 남은 여생이 편안할 수 없었다는 점을 『연좌안』에 실린 연좌인들이 절박하게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5. 지금 우리에게 연좌제는?

지금까지 조선시대 연좌 집행의 사례와 함께 기록 속에 등장하는 연좌인의 삶의 모습까지 추적해보았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시대 연좌율은 갑오개혁기에 폐지되기에 이른다. 『고종실록』에 보면, 1894년 6월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죄인 본인 외에 친족에게 연좌 형률을 일체 시행하지 않는다’는 의안(議案)을 올려 고종의 윤허를 받은 이후 연좌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림10> 고종 국장 장면  장서각 소장 고종국장 사진첩의 한 장면

그런데 실제 연좌제는 이후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연좌제가 형률로서 법전에서 사라지긴 했지만 연좌제의 망령이 지난 20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연좌율 폐지가 공식화 된 이후 80여년이 지난 1980년에 새삼스럽게 제5공화국 헌법에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는 조항(제12조 3항)이 새삼스럽게 명문화되었고, 제6공화국 헌법에서도 일부 자구의 수정을 거쳐 연좌제 금지를 재확인한 것은 어쩌면 연좌제가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시대 상황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마지막으로 연좌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앞서 본 대로 연좌제는 구래의 낡은 형률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필자는 연좌제 적용의 실제 사례와 의미 등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구체적인 실증 작업이 아직까지 충분히 이루어지지는 못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연좌제가 남용되던 특수한 사례만을 가지고 전통시대 형률과 정치문화에 대해서 부정적 편견과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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