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8세기를 설명하는 코드로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정조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단순히 인물론 차원을 넘어 시대론이 되는 까닭은 그를 가리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유교적 계몽절대군주” 내지는 한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로의 전진을 꾀한 “개혁군주”라 평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북학을 근대 지향의 진보적 사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짝을 이루면서 정조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 큰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역사용어로서의 계몽절대군주를 정조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많다.
[그림 1] 보물 제 743호 정조필 파초도(正祖筆芭蕉圖)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동국대학교도서관 소장)
계몽절대군주는 유럽사에서 등장한 학술전문용어이다. 계몽(enlightenment)이라는 말도 역사서술에서는 그 사용에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전문용어이다. 기본적인 개념 정리 없이 그런 말을 지나치게 폭넓게 일반보통명사처럼 사용한다면 적지 않은 혼란이 야기된다. 따라서 먼저 사상 조류로서의 계몽주의사상을 살펴보고 나서 계몽절대군주의 뜻을 정리한 후에,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정조의 정책들을 살피는 것이 순리다.
유럽의 계몽주의사상에도 시기적으로 공간적으로 다양한 버전이 존재했지만, 주지하듯이 계몽사상이라면 대체로 신으로 대표되는 중세사회의 가치와 질서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를 강조한 르네상스시기를 거치면서 축적된 지성사의 바탕 위에 17~18세기 서유럽에서 꽃을 피운 일단의 사조를 말한다. 로크(1632~1704), 몽테스키외(1689~1755), 루소(1712~1778), 볼테르(1694~1788), 칸트(1724~1804) 같은 사상가들이 바로 계몽사상을 주도한 인물들이었고, 고대사회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자연법‧천부인권론‧인간평등 등과 같은 인식뿐 아니라 삼권분립이나 사회계약론 같은 새로운 가치들을 망라한 것이 바로 그 주요 개념이었다. 기존 전통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치체계를 수립하려는 사상적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계몽’과 ‘절대’라는 두 상반적인 성격을 겸비한 계몽절대군주란 어떤 군주를 말하는가? 역사용어로서 계몽절대군주라면, 상기한 18세기 유럽의 그런 계몽사상을 섭취하고 군주로서 자기 권력을 내세워 일련의 변화를 추진하되, 자국의 현실과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적절히 변용해 정책에 반영하고자 한 군주를 일컫는다. 그런데 계몽절대군주는 세계사에서 17~18세기에 동유럽에서만 나타났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루이14세나 잉글랜드 스튜어트 왕가의 국왕들로 대표되는 서유럽의 절대군주제가 자본주의의 발달에 이은 시민혁명이나 명예혁명으로 종말을 고한 데 비해, 동유럽의 절대군주제는 비록 계몽주의사상이라는 외피를 입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군주의 절대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대표적 계몽절대군주로 꼽히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r. 1740~1786),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r. 1762~1796),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1765~1790)와 같은 군주들이 모두 동유럽에서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거시적‧역사적으로 보면, 계몽절대주의는 서유럽의 경우라면 중상주의에 기초한 봉건적 절대주의가 자유주의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로 진화하는 과도기에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동유럽에서는 절대군주제 자체가 19세기에도 줄곧 이어져, 1차 대전을 계기로 해서야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서구 학계에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계몽절대군주를 반동적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본다. 오히려, 계몽절대군주라고 하면 개혁군주니, 성군이니, 현군이니 하는 개념과 충돌하는 반대 개념으로 이해한다.
요컨대, 서유럽에서 발흥한 계몽주의사상의 근간은 기존 권위와 가치체계로부터의 이탈이자 도전이었으며, 그것을 수입해서 십분 이용한 동유럽의 정치적 주체가 바로 계몽절대군주였던 것이다. 전자가 보편적 신에 의한 神政을 부정하고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합의된 법에 의한 정치를 지향하겠다는 사상적 흐름이었다면, 후자의 경우는 그것을 일부 섭취한 국왕이 스스로 철인 행세를 하면서 국내의 봉건영주들을 누르고, 국왕이 주민들을 직접 편제해 제도적 변화를 추진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부국강병을 추진한 군주들을 가리킨다. 비록 그들의 행보는 계몽사상의 본연의 취지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그들이 상기한 일련의 정책을 추구하는 데에 외부적 요인으로 계몽주의 풍조가 일정 부분 작용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개념을 같은 시기(18세기) 조선에 대입한다면, 유럽에서 나타난 교회 중심의 중세적 질서로부터의 이탈 현상과 교회의 自國的 세속화 현상은 공자-맹자-주희로 이어지는 유교 권위의 부정을 상당 부분 필요로 한다. 특히 華夷觀에 기초한 중국 중심의 세계관 탈피가 그 골자가 되어야 한다. 유럽식의 봉건영주는 조선이라면 지역적‧혈연적 기반이 강한 붕당과 그 영수들을 떠올릴 수 있다. 조선의 국왕이 주민들을 직접 편제하고 제도적 변화를 추진한다면, 중국의 시스템에 기초한 전통적 조세‧토지‧군역‧등용‧신분제도 등의 전반적인 개혁이 따라야 한다. 부국강병이라면, 해외무역 권장, 중농정책, 국가 상비군의 확대, 양반의 병역의무 부활, 상공업 장려, 무기와 전술 개발, 장교(무반) 우대, 군관학교 신설 등 일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정조의 가치관이나 정책에서 그런 면을 찾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정조는 주자학적 유교질서의 타파가 아니라 그 회복 및 강화를 추진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재위 기간 내내 심혈을 기울인 각종 편찬사업의 목적과 성격을 훑어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脫中華 여부 문제만 놓고 보아도, 정조의 조선은 정신적으로는 존주의리와 춘추대의로 대표되는 漢族中華에, 정치적으로는 淸秩序에 강력하게 묶여 있었으며, 그런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유교적 계몽절대군주”라는 말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유교적’이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계몽절대군주와 병립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후기사회에서 유교적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중세적 가치를 지향한 데에 비해, 계몽주의사상 내지는 계몽절대주의는 중세적 가치를 뛰어넘는 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조의 사상과 시대인식은 『정조실록』‧『일성록』‧『홍재전서』 등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법과 질서가 땅에 떨어지고 이단사설과 퇴폐풍조가 판치는 시대로 규정하고, 늘 그것을 한탄하곤 했다. 여기서 법과 질서라 함은 당연히 조선왕조가 전통적으로 강조한 유교적 예법과 질서를 말한다. 그러므로 국왕으로서 그가 펼칠 정책의 기본 틀이 어떤 의도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한 예로, 서양사의 계몽절대군주정이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한 데 비해, 정조의 정치는 조선왕조의 건국 당시에 이미 천명된 두 개의 가치, 곧 사대와 유교, 다른 말로 존주의리(사대)와 유교적 질서라는 기존의 가치를 회복해 더욱 공고히 하는 것과 직결된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림 2] 국보 제 153호 일성록 (日省錄)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그렇다면 정조는 개혁군주이기는 했을까? 정조를 계몽절대군주로 보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개혁군주로 보는 데에는 많이 동의하는 추세이므로, 정조의 인물론과 관련해 이 문제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일단 개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원론적인 언급을 하는 것으로써 정조를 개혁군주로 보는 견해에 대해 재론의 여지가 있음을 제시한다.
“A는 B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B의 범위와 그 기준을 분명히 정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조는 개혁군주였다”는 명제를 논증하기 위해서는 개혁군주에 대한 정의나 개념에 대한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정조의 정책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개혁군주의 정의개념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따져보는 것이 논리적 절차이다. 그런데 이런 단계를 밟은 후에 정조를 개혁군주로 평가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개혁이란 무엇일까? 개혁의 일반적‧사전적 의미는 문제가 되고 있는 어떤 제도나 현상을 개선하는 조치까지 포함하지만, 역사학에서 말하는 개혁은 그런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왕이나 대통령이 관리들의 고질적인 불법 비리와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것은 개혁일까, 아닐까?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원칙(법)의 재확립이지, 개혁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법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일 뿐이며, 당연히 그렇게 집행해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집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직무유기이자 불법이므로, 그것을 역사적 시각에서 개혁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역사학에서 말하는 개혁이란 단순한 개선 차원을 넘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역사적 방향성을 갖추어야 한다. 곧 특권계층의 기득권을 급격한 혁명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서서히 포기시키는 것을 말한다. 인민의 무력봉기를 통해 그것을 이루어 낸 프랑스가 혁명의 예라면, 장기간에 걸쳐 타협과 법제화를 통해 그것을 이룬 영국이나 위로부터 강력히 추진된 계획을 통해 이룬 독일의 경우가 개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정조의 정책들 가운데 역사적 방향성을 지닌 개혁이라 볼 만한 것은 별로 없다. 가장 두드러진 개혁처럼 보이는 辛亥通共(1791)조차도, 그것이 정조가 섭취한 어떤 새로운 사상이 독립변수(x변수)로 강력하게 작용한 결과라는 증거는 없다.
[그림 3] 보물 제 1632-2호 정조어필-시국제입장제생 (正祖御筆-示菊製入場諸生)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즉위하자마자 文體反正을 주도한 점이나 거의 집착 수준으로 大報壇 제례를 강조한 점만 보아도, 정조의 최대 관심은 구질서의 회복이자 고수였다. 그는 청이 현실에서 주도하는 새 국제질서를 결코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비정상적인 상태로 보았다. 세상이 이미 이적의 천지가 된 지 100년도 더 지난 18세기 후반에 이르자 사람들 사이에서 명에 대한 의리의식도 시들해지고, 문체도 청의 풍으로 바뀌고, 오히려 청으로부터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론이 대두하고, 천주교가 들어오는 등, 정조가 보기에는 결코 정상적인 시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정조는 이런 새로운 사조를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위한 새로운 요인이자 동력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기존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보았다. 그랬기에, 비록 관념세계에서나 가능했을지라도 춘추의리를 강조하면서 중화질서로의 회귀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래도 정조는 대화와 상식이 통하는 유교적 군주였다. 왕조의 전통이자 국시라 할 수 있는 유교적 성군이 되기 위해 노심초사한 군주였다. 그러나 다가올 시대에 대한 비전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시종토록 옛 전통과 권위를 회복하고자 경주했다. 따라서 오늘날 굳이 따지자면 ‘건전보수’라 할 수 있다. 합리적 상식을 갖춘 보수(건전보수)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현재 한국사회에서 정조가 갖는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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