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전기에는 곤장이 없었다고?
우리가 역사 속에서 사실을 종종 오해하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때론 작은 오해 하나하나가 모여 역사 해석을 전혀 엉뚱하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잘못된 상식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빠른 시일 내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곤장’의 경우도 대중들에게 잘못 알려진 부분이 적지 않다.
곤장은 조선시대에 사용된 형장의 일종이다.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검색해보면 조선 초기부터 ‘곤장’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번역상의 오류이다. 곤장은 조선전기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곤장은 한자로 ‘곤(棍)’이라 쓰는데, 고려와 조선의 매를 치는 형벌인 태형과 장형을 집행할 때 쓰는 형장 ‘태(笞)’와 ‘장(杖)’과는 다르다. 태의 모양은 <그림 1>에서 보듯이 가느다란 회초리를 떠올리면 되는데, 길이가 1미터가 조금 넘고 지름이 1센티미터가 채 안되었다. 그리고 장은 태보다 지름이 약간 클 뿐 모양에 큰 차이가 없다.
반면 곤장은 <그림 2>처럼 배를 젓는 노와 같이 길고 넓적하게 생겨서, 강도가 태와 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곤장을 잘못 맞았다가는 속된 말로 뼈도 추스르기 힘들었는데, 한말 선교사들이 남긴 견문기에서는 불과 몇 대에 피가 맺히고 십여 대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더라고 곤장을 맞던 죄인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그림 1> 죄지은 여자에게 태형을 집행하는 장면으로, 회초리 모양의 형장인 ‘태’가 보인다.
<그림 2> 포도청에서 곤장의 하나인 치도곤을 치는 장면이다.
조선전기에 없었던 곤장은 그럼 언제 출현한 것일까? 『신보수교집록』이라는 법전에 보면 순치 연간(1644-1662)에 제정된 법규 가운데 ‘군병아문(軍兵衙門)이 아닌 곳에서 곤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문이 나오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법전 조문상 가장 이른 시기의 곤장에 관한 규정이다.
그런데 실록에는 곤장에 대한 용례가 이보다 조금 더 앞선다. 즉,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선조 32년(1599) 9월 17일에 함종현령 홍준(洪遵)이라는 인물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부당하게 피해자 가족에게 곤장을 가한 죄로 장령의 탄핵을 받고 있다. 이로써 대략 선조 연간 무렵부터 곤장이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웃나라인 명나라에서는 곤장을 일찍부터 사용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군이 곤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서 조선에서도 배워서 쓰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물론 아직은 순전히 개인적인 상상에 불과하다.
2. 곤장에도 등급이 있었다.
선조대 무렵부터 사용되던 곤장은 군영이나 포도청ㆍ진영ㆍ토포영 등 군법을 집행하거나 도적을 다스리는 기관에 한해서 사용을 허락하였는데, 사용 방법은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번갈아 치도록 하였다. 이후 곤장에 관한 세부적인 조처들도 마련되었는데, 현종 4년(1663)에는 곤장의 재질을 버드나무로 정하였고, 숙종 11년(1685)에는 아예 30대 이상 치지 못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런데 곤장은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모두 다섯 가지나 되었다. 이 다섯 가지는 중곤(重棍), 대곤(大棍), 중곤(中棍), 소곤(小棍)과 <그림 2>에 등장하는 치도곤(治盜棍) 등을 말한다. 정조가 관리들의 형벌 남용을 막기 위해 각종 형구(刑具)의 크기를 통일한 『흠휼전칙』(1778)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여 반포하였는데, 이 책에서 곤장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3> 곤장의 종류와 크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흠휼전칙』에 수록되어 있다.
<그림 3>에서 보듯이 길이는 중곤(重棍)이 가장 긴 약 181센티미터쯤 되는 반면, 타격부의 너비와 두께는 치도곤(治盜棍)이 각각 16센티미터, 3센티미터 내외로 제일 두텁고 크다.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곤장을 누가 사용할 수 있었는지 좀 더 알아보자.
먼저 중곤(重棍)은 병조판서, 군문대장,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가 죽을죄를 저지른 자를 다스릴 때만 쓸 수 있었고, 대곤(大棍)은 군문(軍門)의 도제조, 병조판서, 군문대장, 중군, 금군별장, 포도청,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 토포사 및 2품 이상의 고위직 군무사성(軍務使星)이 사용할 수 있었다.
중곤(中棍)은 내병조, 도총부, 군문의 종사관, 군문의 별장, 천총, 금군장, 좌우순청, 영장, 겸영장, 우후, 중군, 변방의 수령, 사산참군, 3품 이하의 군무사성이 사용할 수 있으며, 소곤(小棍)은 군문의 파총, 초관, 첨사, 별장, 만호, 권관이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치도곤(治盜棍)은 포도청,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 토포사, 겸토포사, 변방의 수령, 변장(邊將) 등이 도적을 다스리거나 변정(邊政)ㆍ송정(松政)에 관계된 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상 『흠휼전칙』의 규정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변방의 수령 등 군사권을 쥔 일부를 제외하고는 고을 수령들은 곤장을 사용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지방 사또가 수틀리면 으레 곤장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같은 행위가 당시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그래도 곤장을 치겠다!
『흠휼전칙』에 정한 곤장에 관한 규정은 법전인 『대전통편』에까지 실렸으며, 이후에도 군무(軍務)에 관련된 죄인을 다스리는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만 곤장 사용이 허락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처벌 대수까지 세밀하게 명시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19세기에 만들어진 당시 대표적인 중앙군인 훈련도감에 관한 사례를 모은 책자인 『훈국총요(訓局總要)』를 보면 별장ㆍ천총 등 장교들이 소속 군인에겐 15대, 소속이 다르면 7대 이상 곤장을 치지 못하도록 못 박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규정을 잘 만들어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요새말로 ‘공직 기강 확립’ 구호가 잠시 뜸해질 땐 어김없이, 정부의 감시가 잘 미치지 못하는 지방 고을 수령들이 규정과 상관없이 불법적으로 형장을 남용하여 예사로 곤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제로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고을 수령들이 법을 집행할 때 통쾌한 맛을 느끼고자 태ㆍ장보다는 곤장을 즐겨 사용하는 당시 세태를 강하게 꼬집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두들겨야 통쾌한 것일까? 정조 말기 창원부사 이여절(李汝節)이란 인물은 부임 이후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무려 경내 삼십 여명의 백성들을 곤장 등으로 마구 매질해서 죽였다. 혹 인간 내면에 원래 이처럼 잔혹한 심성이 숨어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 4> 일제 초기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소장한 대곤(大棍) 사진이다. 길이가 약 186센티미터로 『흠휼전칙』 규정보다 10센티미터 정도 길다. 곤장 실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사회경제실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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